1066년 10월14일 잉글랜드 남부 헤이스팅스 북서부 11㎞ 지점의 구릉 지대. 프랑스 침공군 8,000여명과 비슷한 규모의 방어군이 맞섰다. 나라가 달랐지만 두 군대 지휘부는 민족이 같았다. 데인족(Danes). 잉글랜드 원주민(이베리아족·켈트족)을 몰아낸 앵글족과 색슨족을 누르고 9~10세기부터 잉글랜드를 집어삼킨 민족이다. 침공군도 프랑스에 눌러앉은 북게르만계 바이킹인 데인족의 일파였다. 바이킹의 습격에 진저리 치던 프랑스 왕실이 서부 노르망디를 주고 프랑스인으로 받아들인 데인족이 바로 침공군이었다.
불과 1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스웨덴 남부나 덴마크 지역에서 같이 살던 동족이었지만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맑디맑았다는 이날 오전9시부터 시작돼 해 질 무렵에 끝난 전투에서 방어군은 국왕 해럴드를 포함해 반이 죽었다. 침공군도 2,000명을 잃었으나 인구 140만명의 잉글랜드를 완전히 집어삼킬 수 있는 발판을 얻었다. 잉글랜드의 데인족은 물론 앵글로·색슨계 귀족들은 5년여 동안 항전했지만 ‘정복왕 윌리엄’은 오히려 저항을 반겼다. 반역의 씨를 말리고 몰수한 토지를 가신들에게 하사할 수 있었으니까.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 즉 프랑스 문화에 동화한 데인족의 승인은 크게 두 가지. 첫째, 농민 출신 보병 위주던 상대와 달리 궁수와 보병·기병으로 구성돼 유기적 합동작전을 펼칠 수 있는데다 전투 경험도 많았다. 둘째, 잉글랜드 군대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노르만군보다 먼저 영국 중부를 침공한 노르웨이군을 물리치자마자 400여㎞를 달려온 징집 보병은 전문 군대에 박살이 났다. 헤이스팅스 전투로 인해 굳어진 ‘노르만의 시대’는 영국의 역사에 지대한 흔적을 남겼다. 오늘날 잉글랜드인의 25%가 노르만 군대의 후손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배계급의 언어인 프랑스어와 중세 영어가 섞이며 어휘도 크게 늘어났다.
영국의 성(城)들도 이때부터 축성됐고 봉건제가 자리 잡았다. 신분별 인구와 토지, 특산물, 가축과 삼림 등을 자세하게 조사한 기록물인 ‘둠즈데이북’도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봉건 경제구도로 지배·운영하기 위한 도구였다. 선진화한 데인족인 노르만족은 기록 문화를 널리 퍼트렸다. 옥스퍼드 영국사에 따르면 로마군대가 영국을 떠난 450년부터 노르만 침공까지 토지 관련 문서는 2,000건에 불과했지만 13세기께 800만건으로 늘어났다. 재산에 대한 인식과 기록화는 법제화와 직업 관료제로 이어졌다. 기록과 보존 문화가 없었다면 ‘대영제국’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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