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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17년 마타 하리 총살

'정말 이중간첩이었나' 동정론

마타 하리 /위키미디어




1917년 10월15일 오전5시47분 파리 근교 뱅상 기지. 총살분대원 12명이 총을 쐈다. 처형대에 손이 묶인 사형수의 몸이 축 늘어졌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사형수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옷과 댄싱슈즈를 신고 눈가리개를 거부한 채 죽음을 맞았다. 집행 장교가 리볼버 권총을 머리에 발사하는 확인사살로 처형이 끝났다. 본명 마르헤레타 헤이르타위다 젤러. 유명 댄서보다 ‘미모의 여성 스파이’로 각인된 마타 하리(Mata Hari)의 최후다. 당시 나이 만 41세.

길지 않은 생을 그는 굴곡지게 살았다. 네덜란드 북부 도시에서 부유한 사업가의 장녀로 태어나 귀하게 자라다 13세 무렵 가세가 기울었다. 부친의 재기도 실패해 삼촌 댁에 보내져 적성에 안 맞는 보육교사 학교를 다니다 18세에 찾은 대안이 결혼. 유난히 군복을 좋아했던 그는 구혼광고를 보고 결혼했으나 새로운 악몽의 시작이었다. 20세 연상 대위는 진급이 늦은 화풀이를 음주와 아내에 대한 구타로 풀었다. 인도네시아로 전출되고는 첩까지 들였다. 어렵게 생긴 아들도 병으로 잃었다.



남편과 결별하고 파리로 진출한 그는 ‘동양의 신비’를 무기 삼아 곤궁한 처지에서 벗어났다. 인도네시아에서 배운 벨리댄스와 노출이 심하고 자극적인 몸짓에 남자들이 줄 섰다. 나이가 들며 인기가 떨어졌으나 군인과 외교관들의 구애는 끝없이 이어졌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진 직후 은퇴했지만 개인고객들의 요청은 마다하지 않았다. 독일 황태자 앞에서 일곱 차례 춤춘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전시에 장교들의 ‘관심 연예인’이어서 정보가 집중됐는지 영국과 프랑스 정보기관은 ‘독일 스파이’라는 의심을 품었다.

프랑스 정보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형장으로 보냈다. 사형집행 당일 마타 하리의 몸을 뚫은 소총탄은 4발. 총살 집행대원 12명이 배심원이었다면 무죄가 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정말 그는 이중간첩이었을까. 억울했다는 견해가 많아지는 분위기다. 프랑스에 앞서 그를 체포했던 영국 정보부가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는 극비 문서가 지난 1999년 기밀 해제된 후 동정론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뮤지컬도 나왔다. 프랑스의 누가, 왜 올가미를 씌웠을까. 잇따른 부패 스캔들과 패전에 따른 국민의 불만을 돌릴 재료로 ‘미모의 외국 여간첩’만 한 소재도 없었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조작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오해와 분노, 광기. 소망한다. 교활하게 이를 부추기고 이용하려는 언론과 정치세력이 이제 더 이상 없기를….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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