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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_레터] "당신은 제 말을 듣고 있나요" '조커'가 말하고 싶은 것

영화 '조커'의 흥행이 말해주고 있는 것들

현실의 악으로부터 탄생한 만화 캐릭터 '조커'

우연치곤 닮은 한국과 미국의 '조커 신드롬'

조커와 기생충...계급갈등 다룬 닮은 꼴 두 영화

홍콩사태, 설리의 비극...고담시 떠오르는 현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당신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군요.”




#동네 아이들의 못된 장난에 속고 넘어지며 두들겨 맞기만 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병든 노모를 수발하며 힘겹게 살면서도,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만은 놓지 않고 밤마다 자신만의 ‘조크’를 만드는 성실한 인물이죠. 그랬던 그가 서서히 내면의 악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평범한 시민인 아서(호아킨 피닉스 분)의 말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던 세상이, 피에로 광대 ‘조커’의 살인에는 온 매스컴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주목했기 때문이죠.

지난 2일 개봉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가 화제입니다. 개봉 이후 내내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2주 만에 400만 관객을 끌어모았습니다. ‘와이 소 시리어스(Why so serious)?’라는 대유행어를 남긴 ‘선배 조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 흥행 기록도 가볍게 뛰어넘었죠. 3대 국제영화제인 제76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 히어로 영화 최초로 예술성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DC코믹스가 창조한 빌런(악당) 중의 빌런인 조커의 탄생기를 그린 이 영화에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일까요?

DC코믹스가 1940년에 발표한 코믹북 ‘배트맨’에 첫 등장한 악당 조커


■ 현실의 악으로부터 탄생한 만화 캐릭터 ‘조커’

조커라는 악당 캐릭터의 등장은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처음 공개된 DC코믹스의 만화 ‘배트맨’ 1권에서 하얀 분칠에 기괴한 광대 화장을 한 조커가 나타나 주인공을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이유 없이 게임 즐기듯 잔혹하게 악을 저지르며 배트맨을 농락하는 괴상한 인물이지만, 첫 등장 이후 80년 동안 그의 정체는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그려진 적이 없었죠.

조커는 만화 제작에 참여했던 한 스태프가 극장에서 영화 ‘웃는 남자(1928년 작)’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악당 캐릭터로 만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영화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1869년 작)’가 원작인데, 17세기 유럽에서 악명높았던 ‘콤프라치코스’라는 실제 범죄조직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입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샴쌍둥이, 기형아 등 장애 아동을 마치 서커스단의 원숭이처럼 구경거리로 내세우는 ‘괴물쇼’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콤프라치코스는 빈민가의 아이들을 잡아다 온갖 고문으로 등이 굽은 장애인을 만들어 이들을 귀족들에게 팔아넘기곤 했죠. 그들이 저지른 악행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의 얼굴에 약물을 주입해 기괴한 모습으로 변형시키고 칼로 입을 귀까지 찢어 웃는 표정을 만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커’의 얼굴이었습니다.

1928년 유니버설 제작 영화 ‘웃는 남자’ 캡처


■ 우연치곤 닮은 한국과 미국 ‘조커 신드롬’

만화 배트맨이 등장했던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을 겪고 있었습니다. 도시에는 빈민과 실업자가 넘쳐나고 범죄나 정신질환 같은 사회 문제가 심각했죠. 인종 차별과 계급 갈등도 극에 달했습니다. 만화 속 배경인 범죄의 소굴 ‘고담 시’가 떠오르는 대목이죠.

다만 이번 영화 ‘조커’가 그린 고담 시에선 부자와 빈자로 계급이 나뉘어 가난한 이들은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가진 자들은 유흥을 즐기며 가난한 이들을 “게으르다”고 힐난합니다. 이는 기존 배트맨 시리즈에선 한 번도 부각하지 않았던 설정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설정이 낯선 얘기만은 아닌 듯 느껴집니다. 현실에서도 이미 소득과 직업에 따라 다양한 계급으로 갈리면서 이로 인한 사회 갈등이 만연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영화 조커는 한국뿐 아니라 북미에서도 개봉 직후 2주 가까이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하며 2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뒀습니다. 특히 한국과 미국에서 ‘조커 신드롬’ 현상이 나타나는데, 한국과 미국이 실제 통계상으로도 소득 불평등 현상이 심각한 국가인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이 만드는 세계 상위소득 데이터베이스(the World top Incomes Database, 2017년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상위 1% 소득점유율이 12.2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19개국 중 3위입니다. 미국은 19.34%로 1위죠. 상위 10% 소득점유율 역시 한국이 44.87%, 미국이 48.16%로 높았죠. 한국과 미국의 소득 불평등이 세계 최상위권 수준이라는 의미입니다.



한국을 놓고 볼까요. 지난 8월 통계청이 발표한 2분기 가계동향조사 소득부문 결과에 따르면 1분위(하위 20%) 가구의 소득은 뚜렷이 증가하지는 않은 반면, 5분위(상위 20%) 가구의 소득은 늘어나 상·하위 가계 간 소득격차가 2003년 통계표 작성 이래 역대 최대로 벌어졌습니다. 소득 상위 가구는 근로소득이 늘어난 반면, 소득 하위 가구의 근로소득은 지난 1분기 -14.5%를 기록해 6분기째 쪼그라드는 중입니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주인공 아서 플렉은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뒤 도망쳐 온 화장실에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낀다.


■ 계급갈등 다룬 두 영화, 나란히 최고작품상 영예

공교롭게도 현재 미국에선 영화 ‘조커’를 관통하는 빈부 격차와 계급 갈등을 다룬 또 하나의 영화가 흥행하고 있습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입니다. ‘기생충’은 지난 11일(현지 시간) 미국 LA 단 3곳의 상영관에서 개봉했는데 사흘 동안 37만 6,264만 달러(약 4억 4,600만원)를 벌어들였습니다. 스크린당 평균 수입은 12만 5,421달러(1억 4,800만원)로 ‘라라랜드’(2016) 이후 가장 높은 스코어였습니다. 기생충은 인기에 힘입어 다음 주부터 보스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상영 극장 수를 25~30곳으로 확대됩니다.

영화 ‘조커’에서 피에로 광대 아서가 조커로 바뀔 때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춘 것처럼, ‘기생충’에서도 계단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죠. 두 영화에서 계단은 계급의 상징이자 두 계급 사이를 오가는 통로입니다. 가난과 불평등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마침내 상위층에 분노를 터뜨리는 스토리 또한 닮았죠. 이처럼 다르면서도 같은 주제 의식을 공유하는 두 영화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나란히 최고작품상을 받은 것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영화 ‘기생충’과 달리 ‘조커’에 대해선 혹평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이 영화는 금고에 봉인한 다음에 바다에 빠뜨려 개봉을 막아야 한다”고 비판했고, 미국 타임지도 “데이트하지 못한 슬픈 남자가 킬러 히어로가 되는 영화, 역겹다”며 100점 만점에 20점을 줬다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총기를 난사한다는 극단적인 설정과 피에로 탈을 쓴 폭동가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혁명처럼 묘사한 대목이 불편하다는 인식도 있습니다. 총기 난사 사고에 민감한 미국에서는 히어로물에 이례적으로 R등급(17세 이상 관람가)을 부여하며 제한관람등급을 매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홍콩 정부가 지난 5일 0시부터 복면금지법을 시행한다고 발표한 날, 마스크를 한 홍콩의 시위자들이 벽돌을 채운 손수레를 끌고 거리를 이동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 홍콩사태, 설리의 비극…고담 시 떠오르게 하는 현실

배트맨 첫 등장 이래 80년 가까이 우리는 수많은 범죄와 악을 처단하는 영웅 배트맨에만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악당 조커의 새로운 서사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배트맨이 보여준 정의와 조커가 보여준 정의는 분명 달랐습니다. 자비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조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 공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필립스 감독은 지난달 26일 한국에서 열린 라이브 콘퍼런스에서 “영화는 언제나 당대에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일들을 반영한다. 영화 ‘조커’를 통해서 아동 시절의 트라우마, 사회·경제적인 지위, 취약계층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등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된다면 좋겠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감독의 바람처럼 이미 많은 이들은 영화를 보고 다양한 해석과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지금도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홍콩 민주화 시위가 떠오른다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연예인이라는 가면 뒤에서 악플에 고통받다 황망히 떠난 가수 설리가 떠오른다고도 말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커와 같은 광기가 이미 우리 안에 스며들었다고 이 영화가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강신우기자 see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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