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가 지난 19일(현지시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합의안 표결을 미룬 결정적 이유는 정치권에 급격히 확산된 ‘노딜’ 브렉시트(합의 없는 EU 탈퇴) 우려 탓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영국 4개 연방 중 하나인 북아일랜드를 사실상 유럽연합(EU)에 남겨두는 강수를 둬가며 EU와의 합의안을 마련했지만 의회는 구체적 절차가 없는 합의안만으로는 질서 있는 브렉시트가 보장되기 힘들다고 봤다. 영국 하원은 존슨 총리가 챙겨온 확실하지 않은 브렉시트 합의안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제동을 걸었고 영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운명의 날로 꼽혔던 이날은 브렉시트의 미래를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뜨린 날로 귀결됐다.
존슨 총리는 이번 주 초 브렉시트 이행법률을 제시하고 표결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표결 과정이 더 복잡해진데다 브렉시트를 더 이상 미루지 않겠다던 EU마저 연기를 검토하고 있어 브렉시트를 둘러싼 영국 정국의 혼란은 더욱 극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존슨 총리는 17일 EU와 아일랜드 섬에서 EU 회원국 아일랜드와 국경을 맞댄 북아일랜드에 법적으로 영국 관세를 적용하되 실질적으로는 EU 관세를 적용하는 기형적 방식의 브렉시트 합의안을 도출했다. 전임 테리사 메이 정부가 브렉시트 합의안에 넣었던 ‘백스톱(backstop·안전장치)’ 조항을 빼는 대신 북아일랜드를 영국 본토와 격리시켰지만, 이런 2중 관세로 인한 혼란과 불안감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존슨 총리는 EU와 미래 관계를 확립할 때까지 영국 전체가 EU에 남는 ‘백스톱’이 불투명하고 반민주적이라며 폐기를 주장해왔지만 새 합의안도 정가의 불안한 시선을 불식시키는 데는 한계를 노출했다.
영국 언론들은 합의안 표결이 실패한 것은 합의안에 구체적인 브렉시트 이행 내용이 빠져 노딜 브렉시트에 대한 의구심을 완벽하게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날 승인투표에서 브렉시트 합의안이 가결됐더라도 이후 이행법률 제정 등의 절차를 완료하기까지는 시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영국 BBC방송은 “다수의 하원 의원들이 브렉시트 현실화를 위한 입법이 동시에 결정되지 않으면 결국 10월31일 합의 없이 EU를 떠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면서 “또 존슨의 합의안이 표결까지 불과 이틀 앞두고 나와 분석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데 불만을 품었다”고 설명했다. 수정안을 발의한 보수당 출신 무소속 의원인 올리버 레트윈 경은 이번 법안이 ‘노딜’을 막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라면서 “향후 승인투표에서는 자신이 브렉시트 합의안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밝혔다.
의회에서 합의안 승인 보류라는 일격을 맞은 존슨 총리는 21일 브렉시트 이행법률을 마련해 브렉시트 합의안 재표결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존슨 총리는 이날 하원 표결 패배로 인해 겁을 먹거나 기죽지 않고 흔들림 없이 오는 31일 브렉시트를 위해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EU에 서명 없이 브렉시트 3개월 추가 연기 서한을 보내면서 “브렉시트 추가 연기는 영국은 물론 EU에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만약 21일께 표결이 재추진될 경우 존슨 총리의 합의안이 통과되려면 의결권이 있는 의석 중 과반인 320표를 확보해야 한다. 이날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 연기 투표에서 찬성과 반대가 각각 322표, 306표였지만 노동당 의원 6명, 노동당 출신 무소속 의원 5명이 반대표를 던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따라 다음 주 브렉시트 합의안 승인투표가 실시되면 존슨 총리가 과반을 확보할 가능성도 나온다. 그러나 영국 의원들 사이에 합의안에 대한 강한 반대 기류가 남아 있어 영국 정부가 합의안 승인투표를 강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AFP통신은 내다봤다.
한편 존슨 총리의 브렉시트 시한 연장 요청 서한을 받고 EU 관리들과 각국 대사들은 20일 관련 논의에 들어갔다. AP통신 등 주요 외신은 영국의 브렉시트 연기 요청에 EU가 어떻게 대응할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노딜’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 브렉시트 추가 연기를 승인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보고 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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