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가 22일 오전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이 총리는 이날 오후 1시 고쿄에서 열리는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 참석을 시작으로 2박 3일 동안 도쿄에 머물며 여러 공식·비공식 일정을 소화한다.
역대 최악이라 평가 받는 현재 양국 관계를 감안하면 이 총리가 일본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방일 성과도 가늠하기 힘들다. 청와대도, 일본 총리실도 이 총리 방일 결과 관련 질문에 “가정적인 상황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는 식의 답만 내놓고 있다.
그래도 이 총리는 이날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1호기 편으로 도쿄로 출발하기에 앞서 개인 소셜네트워크(SNS) 계정에 소감을 남겼다. 이 총리는 “레이와(令和) 시대의 개막을 축하 드리고, 태풍 피해로 슬픔에 잠긴 일본 국민께 위로의 말씀을 전하겠다”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치, 경제 지도자들과 만나 한일 간 대화를 촉진하도록 말씀 나누겠다”고 밝혔다.
짧은 메시지이지만 이 총리의 방일 핵심 키워드가 담겨 있다. ‘축하’, ‘위로’ 그리고 대화 ‘촉진’이다.
방일 키워드① 축하 : “새 일왕, 한국에 관심”
이 총리 방일의 공식 목적은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 참석이다. 일본은 지난 5월 1일 나루히토 일왕이 아키히토 상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새 연호 레이와(令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날 즉위식 역시 새 일왕과 새 시대 개막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자리다.
일본 정부는 이날 즉위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정상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모든 국가에 초청장을 보냈고, 이에 174개 국가에서 2,000여 명을 축하 사절 파견을 결정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에 보낼 축하 사절의 급을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 수출규제, 지소미아 종료 등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양국 갈등 상황에서 낮은 급을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과감하게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방일하는 게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고심 끝에 과거 아키히토 일왕 즉위식 당시 관례를 참고해 이 총리 파견을 결정했다.
이에 더해 이 총리 파견 결정에는 한 가지 판단이 더 작용했다. 현재 우리 정부 고위급 내에서 상대적으로 일본을 가장 잘 아는 인사라는 점이다. 그간 여러 차례 ‘지일파’ 총리 역할론이 제기됐던 바, 이번 기회에 이 총리를 일본으로 보내 축하의 인사를 전함으로써 관계 회복의 제스처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 총리 역시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을 찾기 앞서 아사히신문, 교도통신 등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양국 관계 개선의 토대를 만들고 싶다”는 입장을 일본 국민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 총리는 이런 생각을 출국장에 환송 나온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일본대사에게도 직접 전했다. 이 총리는 “상왕(아키히토 전 일왕)의 즉위식에 특파원으로서 취재했는데 이번에 정부 대표로 직접 참석하게 됐다”며 “귀한 인연으로 방문하게 돼서 영광”이라고 말했다.
또 이 총리는 지난해 3월 브라질리아 세계물포럼에서 나루히토 일왕(당시 왕세자)을 만났던 경험도 나가미네 대사에게 전했다. 이 총리는 “그 따뜻함, 친근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레이와 시대에 일본 국민이 행복하고 활기차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즉위식을 갖는 천황(일왕)께서 한국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으로 생각된다. 한일 관계가 조화롭고 성숙한 관계가 되길 기원한다. 양국 관계에 여러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두 나라가 지혜를 가지고 잘 관리해 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방일 키워드② 위로 : “태풍 피해 조속히 복구 되길”
이 총리가 일본에 도착한 오전 도쿄에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에 일본 방송에서는 태풍 ‘하기비스’ 피해 복구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지역에 비바람으로 인한 추가 피해를 조심하라는 안내가 계속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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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비스는 지난 12~13일 동일본 지역을 통과하면서 큰 피해를 남겼다. 일본 국책 연구소인 방재과학기술연구소에 따르면 하기비스는 100년에 1번도 있기 어려운 수준의 막대한 비를 뿌렸다. 인명 피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 21일 기준으로 사망 80명, 실종 11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일본 정부에도 비상이 걸렸다. 태풍 당일 현장을 챙기지 않고 집무실에만 있다가 비판을 받았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현재 틈이 날 때 마다 피해 복구 현장으로 나가고 있다. 다른 각료들도 마찬가지다.
즉위식 부대 행사도 취소됐다. 이날 즉위식과 함께 열릴 예정이던 나루히토 일왕 퍼레이드는 다음 달 10일로 연기됐다. 태풍 때문에 집을 잃고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국민들의 처지를 고려한 결정이다.
이 총리는 이미 지난 15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빌어 “태풍 하기비스로 일본에 큰 피해가 생겼다”며 “일본 국민과 정부에 깊은 위로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 총리는 “문 대통령께서 아베 총리께 진심 어린 위로의 마음을 전하셨습니다만, 저도 일본 국민과 정부에 깊은 위로를 드린다”며 “피해가 조속히 복구되고 이재민들께서 하루라도 빨리 일상에 복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총리는 24일로 예정 된 아베 총리와의 면담 자리에서도 태풍 피해를 위로하고, 조속한 피해 복구를 기원한다는 뜻을 전할 것으로 알려졌다.
방일 키워드③ 촉진 : “한 발짝 나가는 계기 되길”
이 총리는 일본 국민과 정부에 ‘축하’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동시에 우리 국민과 정부를 위해선 별도의 방일 성과를 내야 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불편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역할을 이 총리가 해내길 정부와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두고 일본 정부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그간 ‘1+1(한일 기업 기금 출연)’안을 기본으로, 여러 변형된 방식을 일본 측에 제안했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 기업이 결코 배상에 관여해선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물밑에선 일본 측에서도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해법 도출까지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이 총리는 이번 방일이 대화 촉진, 대화 복원을 위한 진일보가 되길 바란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 총리는 나가미네 대사에게 “양국 관계에 여러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두 나라 지혜 가지고 잘 관리해 나가기를 바란다”며 “단 한 번의 방문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한 발짝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에 나가미네 대사도 “이 총리께선 일본에서도 잘 알려지신 분”이라며 “특히 일본 언론에도 이번에 방일 소식이 널리 보도됐고 지일파 한국 총리에 대해 기대가 많다”고 말했다. 또 나가미네 대사는 “총리의 방일 일정을 보니 일본을 참 잘 아는 분의 일정으로, 이 총리다운 일정”이라며 “이번에 가셔서 두루 만나 교류하시고 좋은 성과를 거둬오시기 바란다”고 기대했다.
/도쿄=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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