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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사회 모순의 우울이 '극단 선택'을 낳다

■사랑,죽음,그리고 미학- 자살과 죽임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자기의 정체성 무너져내릴때

사람들 견디지 못해 자해행위

송파·서초 세모녀 사건은

한국사회 우울증 대변 공통점

제 마음 죽이는 소월식 사랑과

정체성 지키려는 멜랑콜리 사이서

우리의 슬픔 가늠해볼수 있을듯

까마득한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멜랑콜리와 자살이 긴밀히 엮여 있다고 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당시에도 나이에 상관없이 멜랑콜리로 자살한 이들이 많았다고 증언한다. 먹고 살기 급급했던 그 시절에도 우울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니! 이를 상상하기 힘든 이유는 우리 현대인들이 과거를 폄하하면서도 역사에 무지한 데 있을 것이다. 우울증적 자살이 근대 이후에나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속단한다면 이는 섣부른 오판일 수 있다.

자기 비난, 가혹한 자책, 급격한 자존심 실추, 그리고 그것의 극단적 모습인 자살 등이 멜랑콜리커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랑과 자살이 ‘자아가 대상에 의해 압도당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봤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랑과 자살 모두 대상의 존재감에 짓눌리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의 경우 대상이 ‘타자’인 반면, 자살의 경우 또 다른 ‘나’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자살처럼 보이는 현상도 일종의 죽임이라 말할 수 있다. 자살의 피해자는 자신이지만, 가해자 역시 자신이다. 자살은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다. 자살은 행위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자기분열을 전제하며, 대상화된 자기를 죽이는 일종의 살인행위다.

자살을 정점으로 하는 멜랑콜리커의 자해행위는 역설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시도다. ‘멜랑콜리와 사랑 그리고 시간’이라는 책에서 피터 투이는 멜랑콜리커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살 또는 자살 시도는 무엇보다 개인의 ’자기성(selfhood)’의 온전함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자꾸만 쪼개져서 더 이상 정체성을 지킬 수 없을 때 자살을 선택한다. 또 우리의 자기 정체성은 대개 이상화된 것이다. 아름답게 조작된 산물이다. 거울이나 사진에 비친 자기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환상이 깨질 때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환멸(幻滅)에 진저리친다. 환상이 깨지는 것을 환영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김소월 시인의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




1934년 12월23일 소월은 아편을 과다 복용해 죽었다. 일종의 자살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가 우울증을 앓았다고 추정한다. 빈센트 반고흐를 비롯한 숱한 예술가들이 이런 의학적 병인으로 작품을 창작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은 전례가 있기에 소월에 대한 (우울증을 통한) 의학적 해명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못 된다. 그렇다면 정말 소월은 멜랑콜리커였을까. ‘가련한 인생’이라는 작품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가련한, 가련한, 가련한 인생에/첫째는 살음이다, 살음은 곧 살림이다,/살림은 곧 사랑이다, 그러면,/사랑은 무엔고? 사랑은 곧/제가 저를 희생함이다,/그러면 희생은 무엇? 희생은/남의 몸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함이다.…사랑을 함도 죽음, 제 마음을 못 죽이네./살음이 어렵도다. 사랑하기 힘들도다./누구는 나서 세상에 행복이 있다고 하노!’

빈센트 반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것이다. 생존이다. 그런데 소월은 생존을 살림으로 전치한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라도 타자를 살려야 한다. 이런 살림이 사랑이고 자기 희생이다. 여기서 역설에 빠진다. 자기 생존이 자기 희생으로 반전되기 때문이다. 서양적 시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지점은 살음이 살림으로, 살림(사랑)이 자기 희생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 ‘제 마음을 못 죽이네’라는 구절에서 죽임은, 살음이 살림이 되듯, 사랑을 위한 것이다. 마음, 곧 기존의 자기 정체성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자기 희생의 소월적 의미다. 희생이란 그저 자기 몸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먼저 (고정되고 미화된) 자기 정체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타자를 사랑할 수 있고 살릴 수 있고, 결국 내가 살 수 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죽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렵게 허덕이며 사는 우리네 인생이 가련해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우울을 보여주는 사례로 2014~2015년에 연이어 발생한 송파와 서초의 세 모녀 사건을 꼽을 수 있다. 송파 사건은 자살이고 서초 사건은 살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나지만, 한국 사회의 모순에서 파생된 우울이 죽음을 야기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송파의 경우, 세 모녀가 만성질환과 실직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전 재산(현금 70만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놓아두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사건이다. 현행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잘 보여준 사건이자 동시에 아무리 자살로 내몰려도 (멜랑콜리커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바보 같은 다정(多情)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반면 서초의 경우, 명문 사립대 출신에 기업 임원까지 지낸 엘리트가 주인공이다. 그는 실직한 뒤 재취업을 못한데다 주식투자마저 실패하자 부인과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하고 자살을 기도했다. 이 사건은 부의 불평등에서 파생된 ‘상대적 박탈감’이 매우 심각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또 이 살인범에게서는 개인의 과도한 자기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인데’라는 공고했던 자의식(자기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살인을 범한 경우다. 이는 한보다는 명백히 멜랑콜리적 죽임에 해당된다. 이 두 사례를 포함해 전반적으로 지금 우리가 겪는 슬픔은 한과 멜랑콜리 ‘사이’에 있다. 제 마음을 죽이는 소월식 사랑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마음이 몸을 죽이는 멜랑콜리커의 자살, 이를 좌표축으로 삼아 현재의 자살 현상을 측량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신식교육과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문화를 접했던 소월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도 소월은 한(恨) 쪽에 많이 기울어 있다.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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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기자 여론독자부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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