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대법원 파기환송 후 첫 재판을 받은 가운데 해당 재판부가 이 부회장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1993년 독일에서 당시 만 51세였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언급하며 올해로 만 51세를 맞은 이 부회장에게 어떤 선언이 있는지 물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에게 “재판 중에도 당당히 기업 총수 역할을 해 달라” “스스로 재벌 체제 폐해를 시정하라”고 당부하는 등 이 부회장의 양형 판단에 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고려하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은 11월22일과 12월6일 두 차례 재판을 더 한 뒤 이르면 연내 선고할 전망이다.
25일 오전 10시10분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에서 재판장인 정 부장판사는 재판 말미 “이재용 피고인에게 당부드린다”며 “어떠한 재판 결과에도 책임을 통감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심리에 임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재판 심리 중에도 당당히 기업 총수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길 바란다”며 이건희 회장의 과거 신경영 선언을 언급했다. 정 부장판사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만51세 이건희 총수는 낡고 썩은 관행을 버리고 사업의 질 높이자고 이른바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며 “2019년 똑같이 만 51세가 된 이재용 삼성그룹 총수의 선언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느냐”고 물은 뒤 재판을 마무리했다. 이 부회장은 이에 대해 공손한 자세로 “네”라는 답변만 했다.
이날 공판에서 이 부회장 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이 이미 나온 상황에서 예상대로 유무죄 판단은 다투지 않고 양형 심리에만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최근 집행유예 확정 판결을 받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거론하며 “국정농단 사건은 삼성뿐 아니라 여러 기업이 얽혔다”며 다른 사건 기록도 보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특별검사팀은 “이 사건 핵심은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과 부정한 청탁의 뇌물”이라며 “승마 지원의 경위와 동기를 모두 살펴서 양형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양측 의견을 들은 정 부장판사는 “이 사건은 수사와 재판을 위해 많은 국가적 자원이 투입됐고 재발 방지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크다”며 “몇 가지가 해결되지 않으면 삼성그룹이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건과 같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실효적인 기업 내부 준법감시제도가 필요하다”며 “재벌 총수는 이스라엘 등을 참고해 재벌 체제 폐해를 시정하고 혁신경제로 나아가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사실상 첫 재판부터 법리적 쟁점보다는 이 부회장의 역할론을 강조한 것이다.
재판부는 오는 11월22일 오후 2시5분 유무죄 판단을 위한 재판과 12월6일 오후 2시5분 양형 판단을 위한 재판을 각각 연 뒤 심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최종 선고는 이르면 연내 가능할 전망이다.
이날 불구속 상태로 처음 법정에 나온 이 부회장은 취재진에게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정에서도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입술만 조금씩 움직였다. 함께 재판을 받은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 등은 모두 자신을 ‘무직’이라고 소개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