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폴 게티(1892~1976)는 금수저였다. 1914년 아버지로부터 받은 1만달러로 시작한 게티의 사업은 손대는 것마다 성공 가도였다. 오클라호마 유전에 투자해 1916년 백만장자가 됐다. 1957년에는 포춘지가 뽑은 미국 최고 갑부였고 1966년에는 세계 최고 부자(12억달러)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게티는 집이 3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LA) 시내의 저택은 현재 LA 시장의 공관으로 쓰이고 있다. 방이 100개 있었다는 말리부 바닷가의 집은 사라졌고 말리부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있던 랜치하우스가 게티미술관의 모태가 됐다. 이 집에서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했고 랜치하우스와 연결된 부지에 1974년 완공해 문을 연 것이 게티빌라다.
천문학적인 부자였지만 그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초대 미술관장이 자동 연필깎이를 구입하자 “이런 물건은 필요 없는 것”이라며 비용 정산을 해주지 않아 관장이 다시 문방구로 돌아가 환불을 받아왔을 정도다. 미술관을 지은 것도 세금공제 때문이었다. 1973년 손자인 게티 3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납치됐을 때는 1,700만달러를 요구하는 범인들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범인들이 손자의 오른쪽 귀를 잘라 보내는 와중에도 300만달러로 줄어든 몸값을 세금공제 한도인 220만달러까지 낮췄다.
게티가 빛을 발한 건 그의 사후부터다. 그가 죽으면서 기부한 7억달러를 바탕으로 45만㎡의 부지에 14년이라는 시간을 들인 끝에 1997년 게티센터가 탄생했다. 빈센트 반 고흐와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거장의 작품은 물론이고 루이 14세 초상화를 비롯한 유럽 왕실 소장품도 보관돼 있다. 주차장에서 미술관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트램을 타고 언덕을 올라가 만나는 하얀색 대리석 건물은 왜 이곳을 ‘21세기의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그런 게티센터가 캘리포니아 대형 산불의 위협을 받고 있다. LA 북서부 셔먼옥스에서 발화한 불길이 게티센터 턱 밑까지 번진 것이다. 하지만 게티센터는 12만5,000여점의 예술품을 옮길 계획이 없다. 2중 철문에 외부 공기가 들어올 수 없는 시스템을 갖췄고 건물 전체가 화강암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건축비만 1억3,000만달러가 투입된 결과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천재지변에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김영기 논설위원 yo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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