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기본은 대의명분이다. 명분으로 동의를 구하고 이견을 좁혀가는 것이 정치와 세상살이의 이치다. 전도유망한 두 의원이 현실 정치 포기를 선언했다는 사실은 여의도 정가의 한계를 말해준다. 동의를 구하고 공감대를 확산시키기도, 이견을 수용하기도 어려웠으리라. 두 의원이 여의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남다른 능력을 펼치시기 바란다. 떠나려는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남은 자들의 과제다. 마땅히 두 의원의 자리를 대신할 대상은 30·40대여야 한다. 20대라면 더욱 좋다.
젊은 피로의 물갈이는 정치권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시대적 소명이다. 기업과 정부, 정치권의 정점에 있는 5060은 물러나야 할 때다. 물론 개별적으로 5060은 노부모 봉양과 미혼 자녀의 뒷바라지까지 할 일이 여전히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 할 만큼 했고 누릴 만큼 누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기성세대가 후배들에게 바통을 넘겨주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 자기 규제밖에 없다. 구체적 예로 노년 수당과 국민연금·공무원연금·군인연금 같은 각종 복지를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합의에 도달하려면 반성이 전제돼야 한다. 주지하듯이 우리나라를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에 이르게 만든 동력은 사람이다. 부모 세대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들을 위해 아끼고 참은 결과가 오늘날 우리다. 혜택받은 세대인 5060은 후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이미 적자가 난 연금을 저임금의 젊은 층이 낸 세금으로 충당하고 수급자들은 해외여행을 즐기는 구조는 지속하기도 어렵거니와 불공정하다. 보다 더 좋은 세상은커녕 부모에게 받은 정도마저 20·30대에게 물려주지 못한 우리 세대는 부끄러워야 한다.
경제학자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은 개릿 하딘 미국 생태학자가 떠오른다. 1963년 발표한 학술논문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으로 유명한 그는 89세를 맞아 인구 과잉에 따른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 ‘존엄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죽는 날을 고를 권리와 의무가 있다며 치매에 걸린 아내와 같이 죽었다. 하딘 같은 노년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의 대도시 주택가에는 요양병원과 요양원이 갈수록 늘어난다. 5060이 하딘과 같은 나이가 될 20~40년 후에 우리 후대들이 비용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장력과 인품으로 타사 후배에게도 존경받았던 어떤 기자 선배 한 분은 70세에 암 판정을 받자 연명치료를 마다한 채 눈을 감았다.
가혹한가. 그렇지 않다. 지금 행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미래, 후손들이 살아갈 사회는 더욱 가혹하고 암울하다. 작금의 인구구조와 출생률을 가지고 대한민국은 존속이 불가능하다. 어느 정파가 집권하든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구조적으로 물 건너간 마당에 5060의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냥 이대로 흘러가는 것, 다른 하나는 변혁과 양보의 주체가 되는 길이다. 전자라면 우리 세대는 상승에서 하강으로 꺾이는 변곡점이라는 오명에 영원히 갇힐 수밖에 없다. 후자를 고른다면, 즉 우리 세대가 스스로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회의 앞날을 연 선조들로 남을 수 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엷어질 사회보장을 대신할 방도는 사회적 자본 확충에 있다. 노년층이 단순 서비스직을 맡거나 농어촌으로 가서 상부상조한다면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풍성한 가을과 혹독한 겨울을 지나야 신록의 봄과 성숙의 여름을 맞듯, 노년층이 중심을 잡고 건전해야 사회가 앞으로 나아간다. 올해 달력도 이제 두 장밖에 남지 않았다. 잎새는 떨어지는 게 정상이다. 단풍이 들어 낙엽으로 지지 않고 말라붙은 채 나무에 달린 잎사귀는 없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자체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간혹 영생을 꿈꾸는 체내 세포의 다른 이름은 암이다. 깊어가는 가을, 정치권도 사회도 노추의 욕심을 떨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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