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가 시작한 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은 오전9시30분께 현지에 마련된 프레스센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예상 밖의 ‘깜짝 환담’을 나눴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그로부터 30분 뒤 서면브리핑을 내고 양국 정상이 11분간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9월 유엔총회를 계기로 성사된 한일정상회담 이후 13개월 만의 대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아베 총리와의 환담에 이어 로버트 오브라이언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35분간 접견하는 등 한일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이어갔다. 문 대통령은 오브라이언 보좌관과의 접견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문제를 비롯한 한일관계와 국제 정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와의 환담은 문 대통령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성사됐다. 외교 라인의 사전 조율은 일절 없었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아세안+3 정상회의가 시작되기 전 정상 대기장에서 아세안 정상들과 인사를 나누던 문 대통령이 마침 대기장으로 들어오던 아베 총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옆자리로 데려왔고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급하게 성사된 만남이었던 탓에 양 정상의 대화는 일본어-한국어 통역이 아닌 영어 통역으로 이뤄졌다. 문 대통령의 말을 우리 측 통역이 영어로 전달하고 이를 일본 측 통역이 다시 일본어로 통역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양국 정상은 현지시각으로 오전8시35분부터 46분까지 약 11분간 대화를 나눴다. 이 환담은 매우 우호적이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고 고 대변인은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원칙을 확인했다. 고위급 협의 가능성도 열어뒀다. 환담 중 문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보다 고위급 협의를 갖는 방안도 검토해보자”고 제안했고 이에 아베 총리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도록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시한(23일 0시)이 임박한 가운데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문 대통령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의 ‘고위급 협의’ 제안이 사실상 한일정상회담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지만 청와대는 “확정적으로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답했다.
다만 이번 환담과 관련된 일본 정부의 입장문에는 한일 문제에 대한 ‘강경 기류’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일본 외무성은 이날 “아베 총리가 문 대통령에게 양국 간 문제에 관한 일본의 원칙적 입장을 확실히 전달했다”고 밝혔다. 양국 간의 온도 차는 느껴지지만 청와대는 한국과 일본이 궁극적으로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재확인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지난달 24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일왕 즉위식 계기 방일 당시 아베 총리와 회담하며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한 것이 이날 환담 성사의 ‘촉매제’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모친상을 당한 문 대통령에게 위로전을 보내기도 했다.
다만 지소미아 종료 전까지 한일 갈등을 해결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 7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감행하면서 본격화된 한일 갈등이 지소미아 종료까지 불과 20일도 남지 않은 시간 내에 해소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측이 ‘지소미아 종료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 ‘우리 정부가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대통령의 전략적 행보가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EAS 회의 직전 이뤄진 오브라이언 보좌관과의 접견에서 문 대통령은 지소미아 문제 등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이해를 당부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오브라이언 보좌관에게 “앞으로도 청와대와 백악관 간 긴밀한 소통을 지속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또 오브라이언 보좌관이 북한과의 대화를 견인하기 위한 조언을 구하자 남북 간 대화 경험을 소개하며 “인내심을 갖고 북한을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접견에서 문 대통령은 모친 고(故) 강한옥 여사의 별세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가 담긴 트럼프 대통령의 친필 서명 서한도 전달받았다.
한편 청와대는 방일 중인 문희상 국회의장이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의 기업과 국민들의 기부금으로 재원을 마련해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내용의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1+1(한국과 일본 기업이 배상금 마련)안”이라며 “일단 (1+1에서 더 나아가) 공식적으로 더 제안을 하거나 이런 것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한일 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며 해당 문제 해결을 위한 물밑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방콕=양지윤기자 y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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