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자동차의 한 협력업체 부사장 A씨는 지난 2014년 인도와 러시아 등 해외 자동차 제조회사에 영업비밀을 누설했다. 해외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자신들의 우수한 기술력을 내세우려 현대차의 차체 검사기준서와 ‘지그 설비’ 기술표준 등을 불법적으로 공유한 것이다. 경찰은 A씨 등을 검찰에 송치했지만 유출에 가담한 인도와 러시아 기업 직원들에 대해서는 현지 당국의 비협조로 추가 수사를 벌이지 못했다. 더구나 올해 9월 재판 결과 A씨 등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는 데 그쳤다.
이처럼 산업기술 유출로 국내 기업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지만 다른 나라 정부의 비협조로 사정 당국의 관련 수사가 어려운 가운데 법원조차 무거운 처벌을 내리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도 기술유출 피해를 막기 위해 형량 강화 등 법 개정에 나섰지만 중소기업들의 기술보호 시스템과 인식개선이 동반돼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이 나온다.
6일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은 올해 4~10월 7개월간 기획수사를 통해 해외로 산업기술을 유출한 기술유출 사범 36명(10건)을 검거했다. 10건 중 6건이 중국으로 유출됐다. 특히 최근 5년간 검거된 전체 해외 기술유출 사건 70건 중 중국 유출이 46건(66%)이나 차지했다. 이 같은 경찰의 일부 성과에도 기술유출 사범을 검거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들 사건은 해당 현지 당국의 형사사법 공조가 필요하지만 대다수가 협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시진핑 정부의 ‘기술패권’이나 ‘제조굴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산업스파이를 운영하는 것으로 국제사회에서 의심받고 있다. 미중 무역협상의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도 중국의 기술탈취 방지다. 사정이 이러니 중국 공안당국이 기술 유출범 검거에 협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사정 당국이 기술탈취 수사 협조를 집요하게 요청할 경우 향후 살인 피해사건 등에 대해서도 공조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며 “기술유출범을 잡기 위해 협조가 안 되는 사건을 계속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검찰이나 경찰이 어렵게 수사 결과를 내놓더라도 법원에서 ‘솜방망이 처벌’ 결과만 나온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경찰의 수사 후 기소돼 재판까지 완료된 사건 중 실형을 받는 경우는 전체의 5% 수준에 불과하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산업기밀 및 영업기밀 등이 유출된 당사자는 기밀 보안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는 ‘비밀성’을 입증해야 한다. 현행 법률상 원천기술을 탈취당하더라도 해당 기업에 보안 유지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평소 보안 시스템 등을 만들지 않고 직원교육도 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관련 현행법도 기술유출범 처벌이 집행유예 등으로 끝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다.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은 현재 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 시 15년 이하의 징역 등을 내리게 돼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하한이 아닌 상한을 둔 징역형은 사실상 판사의 재량에 맡긴 것이기 때문에 결국 법이 물렁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는 올해 관련법을 개정해 외국인이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업을 인수합병(M&A)할 때 신고 의무를 확대하고 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 시 15년 이하에서 최소 3년 이상으로 처벌 형량을 강화했다. 또 기술침해 시에는 법원이 최대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은 내년 2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형량 강화 대상은 산업기술 중 국가핵심기술에만 해당해 보완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부의 한 관계자는 “국가핵심기술은 국내외 시장에서 차지하는 기술적 가치가 높은 기술만 형량을 강화하고 일반 산업기술은 기존의 형량인 15년 이하 징역을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되지 않은 일반 산업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들의 기술유출에 대해서는 여전히 형량이 가벼울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기업 보안 시스템 지원과 더불어 중소기업의 인식개선이 동반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전체 기술유출 피해 기업의 94%(85건)는 중소기업이다. 이들 기업이 먼저 나서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희재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장(서울대 기계공학과 교수)은 “미국 중소기업은 외부인이 방문할 때 눈으로 본 것마저 외부로 유출하지 않도록 서약서를 받고 법적 책임을 지게 한다”며 “우리 중소기업은 이런 기본적인 부분도 대부분 준비가 안 돼 있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박 협회장은 “관련법 개정도 필요하지만 중소기업들이 산업기술 보안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하는 게 우선”이라며 “‘계몽’이 필요하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산업기술 보호 인식은 그동안 부족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연구를 통해 새 산업기술이 개발되면 특허청에서도 개발자에 대한 금전적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실제로 서울대 공대 A교수는 2016년 ‘초음파 트렌스듀서’ 기술과 관련해 논문을 내 국내 특허를 냈으나 최근 한 중국 기업이 그 기술을 그대로 사용, 이미 산업화해 판매에 들어간 것을 발견했다. 중국에는 특허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박 협회장은 “실제로 해외에도 특허를 내려면 한 건당 약 2,000만원의 돈이 들어 개발자가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는 해외에 우리 기술의 연구 결과가 무작위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손구민기자 kmsoh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