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오철수 칼럼] 누가 민주주의를 뒤흔드는가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 있어도

운영 잘못하면 사회혼란 불가피

시행령·훈령 이용한 정책 남용땐

법치주의 근간 해치는 결과 초래

오철수 논설실장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18년 11월9일.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자 독일에서는 공화정이 선포됐다.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정치세력들은 패전의 혼란 속에서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 1월19일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됐고 같은 해 8월에는 헌법이 통과됐다. 이것이 현대 헌법의 효시로 평가받는 바이마르 헌법이다. 당시 독일 법률가들은 각국의 좋은 제도를 모두 가져와 헌법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국민주권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요소까지 가미했다. 대통령과 의회의 권한을 세밀하게 규정해놓았고 언론·집회·정당결성의 자유 등 기본권을 보장했다. 여성들에게도 처음으로 투표권과 참정권을 부여했다. 독일 국민들은 바이마르 헌법에 규정된 법치국가 개념만으로도 지도자에 의한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바이마르 헌법도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강탈을 막지 못했다. 히틀러는 선거에서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독일 재무장 등 포퓰리즘 공약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히틀러는 대통령을 움직여 집회와 출판을 통제했고 급기야는 수권법(授權法)을 통과시켜 의회를 무력화했다. 이로 인해 인류는 또다시 세계대전의 참화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독일의 사례는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도자가 그것을 잘못 운영하면 엉뚱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바이마르 헌법은 왜 독재자의 부상을 막지 못했는가.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분석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저서에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헌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두 가지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자제(forbearance)를 제시했다. 관용은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것을 말하고, 자제는 법적으로 주어진 권한이라도 함부로 쓰지 않고 신중하게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의회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법을 만들어 권력의 칼을 휘둘렀으니 바이마르 헌법도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이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의 분석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우리나라에서 정당들은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국회가 열리기만 하면 동물국회가 되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더 심각한 것은 신중하지 못한 권한 행사다. 문재인 정부 들어 법망을 우회해 시행령이나 훈령을 통해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다반사가 됐다. 법무부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 과정에서 피의사실 공표 문제가 불거지자 훈령을 통해 형사사건 관련 내용의 공개를 금지했다. 이는 자칫 국민들의 알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는 중요한 사안이지만 언론은 물론 국회와도 어떤 논의도 하지 않았다. 교육부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고쳐 2025년부터 자율형사립고·외국어고·국제고를 일반고로 일괄 전환키로 한 것도 비슷한 케이스다. 금융위원회도 연기금의 기업 경영참여를 쉽게 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이와 유사한 사례는 일일이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다.



문제는 이 같은 정책 추진이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점이다. 국회를 무시하고 정책을 추진하면 삼권분립이 흔들리게 되고 상위법과 충돌하는 상황도 발생하게 된다. 앞으로 정권이 바뀌면 같은 절차를 통해 정책이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정권에 따라 정책이 오락가락하게 되면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법이나 제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운영을 잘못하면 효과는커녕 오히려 부작용만 낼 뿐이다. 국회를 설득하는 것이 힘들다고 손쉬운 길을 가면 당장 일을 하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사회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정부는 법망을 우회한 정책 남용이 민주주의의 가드레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csoh@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