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진범 논란’이 불거진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을 이춘재(56)라고 잠정 결론 내린 15일 과거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옥살이를 한 윤모(52)씨 측은 당시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를 공개했다.
윤씨의 재심을 돕는 법무법인 다산은 이날 윤씨가 이 사건 범인으로 검거된 1989년 경찰이 작성한 진술조서 2건, 피의자신문조서 3건, 윤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언론에 배포했다.
이들 조서에는 사건 당일 윤씨가 기분이 울적해 집을 나선 뒤 배회하다가 이 사건 피해자인 박모(당시 13세)양의 집에 담을 넘어 침입해 자고 있던 박양을 살해·강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앞서 알려진, 윤씨가 과거 경찰 수사 과정에서 자백한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날 경찰이 이춘재를 이 사건 진범으로 특정한 이유로 꼽은 이춘재의 범행 당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자백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윤씨가 박양이 입고 있던 속옷 하의를 무릎 정도까지 내린 상태에서 범행하고 그대로 다시 입혔다고 적혀있지만, 이춘재는 박양이 입고 있던 속옷을 완전히 벗기고 범행한 뒤 이 속옷으로 현장에 남은 혈흔 등을 닦고 새 속옷을 입힌 뒤 현장을 빠져나왔다고 자백했다. 중학생이던 박양이 애초 속옷을 뒤집어 입은 채 잠을 자고 있었을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술의 신빙성은 이춘재의 것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이 밖에 박양의 집과 방에 침입하는 과정이나 박양의 방 안 모습 등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 차이가 나는데, 경찰은 남아 있는 수사기록 등을 토대로 이춘재의 자백이 과거 윤씨의 자백보다 실제 상황과 더욱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윤씨 측 박준영 변호사는 윤씨의 조서 내용이 이처럼 현장 상황과 다르게 기재된 이유는 현장 상황을 잘 모르는 경찰이 준 정보대로 윤씨가 진술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박 변호사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서상의 윤씨 진술은 경찰이 사건 관련 정보를 담아 만든 것인데, 조서를 작성한 경찰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이 생긴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윤씨가 자필로 작성한 진술서를 본 뒤 이 조서들을 보면 윤씨가 조서에 담긴 것과 같은 구체적이고 풍부한 진술을 일목요연하게 했을 리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당시 경찰은 참 무서운 수사를 했다”고 덧붙였다.
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양의 집에서 박양이 성폭행을 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이듬해 7월 윤씨를 범인으로 특정해 강간살인 혐의로 검거했다. 재판에 넘겨진 윤씨는 같은 해 10월 수원지법에서 검찰 구형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도 형이 확정돼 20년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됐다. 그러나 최근 경찰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특정한 이춘재가 8차 사건을 포함한 10건의 화성사건과 다른 4건 등 모두 14건의 살인을 자백하고 윤씨가 억울함을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하면서 진범 논란이 불거졌다.
/이희조기자 love@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