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회의 시작 1시간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미국 협상팀이 먼저 일어섰습니다. 당초 회의 종료시간은 오후 5시.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회의를 끝내버린 겁니다. 양측 입장 차가 큰 터라 합의에 이르기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회의가 파행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 측은 당황했습니다.
美→ 韓 “시간 줄 테니 새 방위비 분담안 내놔라”
회의 파행도 난감한 일인데 예상치 못했던 일은 또 벌어졌습니다. 미국 협상팀이 예정에 없던 공개 브리핑을 한 겁니다. 미국 측 수석대표인 제임스 드하트 국무부 선임보좌관은 회의 직후 서울 남영동 미 대사관 별관으로 이동해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이 내놓은 제안은 공정하고 공평한 분담을 바라는 우리 측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한국이 상호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임할 준비가 됐을 때 협상이 재개되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더해 드하트 대표는 “우리는 한국 측이 재고할 수 있는 시간을 더 주기 위해 오늘 회의를 짧게 끝냈다”며 “위대한 동맹정신에 따라 한국이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안에 양측이 함께 다다를 수 있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현장에서 질문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이에 적힌 내용만 읽고 자리를 떴습니다.
北→美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 가져와라”
그런데 말입니다. 성명 발표 자체는 이례적이었지만, 발표 내용은 왠지 익숙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말까지 용단을 기다리겠다” “지금의 정치적 계산법을 고집하면 문제 해결 전망은 어둡다” “새 계산법을 가져와라”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이후 북한이 틈만 나면 미국을 협박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입니다.
핵 협상을 위해 연말까지 시간을 줄 테니 새 계산법을 미국에 내놓으라는 건데, 방위비 협상이 연내 타결되길 바란다면서 한국에 새 제안을 가져오라는 논리가 괜히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안규백 의원은 결국 한마디 했습니다. 안 의원은 20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이런 협상 행태에 대해 “이른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부적절하고 무례한 행동”이라며 “외교상 결례라고 판단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간 미국이 핵 협상 과정에서 여러 차례 비난했던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린치핀’ 동맹이라는 한국에 들이댔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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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벼랑 끝 대치에 치킨게임까지
벼랑 끝 전술은 북한과 미국만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한일 관계에서도 ‘벼랑 끝 전술’은 오고 갑니다. 심지어 한국과 일본은 벼랑 끝 대치에 더해 치킨게임까지 하는 형국입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일본 기업 배상 판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결정 등 양국은 서로 더 세게 압박할 카드만 연이어 내놓았습니다. 정부의 강대강 대치에 상대국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감정도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한국에선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거세게 일었고, 일본에선 ‘혐한’이 트렌드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양국 사이에는 그 흔한 외교적 수사도 없습니다. 오히려 종종 나오는 한일 양국 정상의 단호한 화법이 외교 실무자들의 운신의 폭을 더 줄여버리곤 합니다. 실무자들은 이럴 때마다 벼랑 끝으로 몰리는 기분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또 전문가들은 양국에서 지소미아 같은 중대 안보 영역에 대해 일반인 대상 여론 조사가 실시 되고, 이를 정부가 참고하는 모습을 보일 때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다행히 한일 양국은 지난 22일 지소미아 효력 종료를 불과 6시간 앞두고 파국을 피하기 위한 조율에 가까스로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임시 봉합입니다. 한국은 지소미아 종료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일시 유예했고, 일본은 수출 규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하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일시 유예는 언제든 재가동할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일본의 노력은 그저 약속일 뿐입니다. 이날 합의가 실효성이 있는지는 시간이 알려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벼랑 아래로 떨어져선 안돼
물론 현재의 어려움은 결코 우리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국제 사회 전반이 ‘자국 이기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방위비 협상에서 보듯이 미국은 “동맹 리뉴얼”을 주장하면서 한국에 무리한 증액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미국과의 경제 전쟁으로 심기가 불편한 중국은 한미 관계를 호시탐탐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 국가는 국제사회 입지 관점에서 우리가 쉽게 설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결국 국제관계의 현실이 이렇기에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합니다. 과오가 있으면 신속하고 진지하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대안을 찾을 때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따지고, 더 넓은 관점에서 국제 관계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또한 외교적 노력의 지향점은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한결같이 꼽는 ‘국익’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국익에는 현재 국민의 안녕에 더해 반드시 미래 세대를 위한 보험성 가치가 포함돼야 합니다. 정권 재창출이나 탈환, 개인으로서 지키고 싶은 가치나 출세욕이 노력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안보 협력 분야 경험이 많은 한 전직 고위 장성은 현재 외교·안보 상황에 대한 평가를 요청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군들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게 우리한테 도움이 되면 그렇게 하면 돼요. 하지만 현실이 그런가요. 가래침을 삼키는 기분으로 협상에 임해야 할 때도 있어요. 안보 문제는 특히 더 그래요.”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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