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이 29일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라는 ‘궁여지책’을 꺼낸 데는 선거제·검찰개혁 법안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을 둘러싼 여야의 극한 대치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당은 그동안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 등 검찰개혁 법안과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적용된 선거제 개혁안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이른바 ‘친문(親文) 게이트’ 국정조사까지 투쟁 수위를 높였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합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며 선거제·검찰개혁 법안 등의 연내 처리를 압박해왔다. 결국 양측 사이의 양보 없는 대치가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마저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한국당은 앞선 의원총회 과정에서 필리버스터를 ‘최후의 보루’로 꼽은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버스터가 마지막 카드인 만큼 쓰는 시기를 선거제·검찰개혁 법안이 본회의에 올려질 수 있는 다음달 3일 이후로 봤다는 것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담은 선거제 개혁안은 지난 27일 부의됐다. 공수처 설치법 등 검찰개혁 법안의 부의 날짜는 다음달 3일이다. 애초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두 법안의 부의 이후 본회의에 올려지는 때 쓰려고 했으나 이날 의총에서 필리버스터라는 ‘최후의 무기’를 꺼내기로 결정했다는 게 한국당 복수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불법 사보임, 안건조정위 무력화 등 계속되는 불법과 다수의 횡포에 이제 한국당은 평화롭고 합법적인 저항의 대장정을 시작하려는 것”이라며 “저항의 대장정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불법 패스트트랙의 완전한 철회 선언과 친문 게이트 국정조사 수용”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여론 악화를 우려해 이른바 ‘민식이법’ 등 민생법안의 경우 필리버스터를 하지 않고 표결이 진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국회의장이 선거법을 직권상정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한국당은 안건마다 의원 1명이 4시간씩 돌아가며 필리버스터를 할 계획이다. 이날 본회의에 오른 안건이 총 199건으로 한국당 의원은 총 108명이다. 한국당 의원 100명이 4시간씩 한다면 800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할 수 있게 된다. 본회의가 이날 열린다고 가정할 때 올해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다음달 10일까지 270여시간 밖에 남지 않아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는 게 한국당의 계산법이다.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선언으로 이날 국회 본회의가 올스톱 상태에 빠졌다. 애초 국회는 이날 본회의에서 사립유치원 회계 투명성 강화를 위한 ‘유치원 3법’,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를 위한 ‘민식이법’, 데이터 경제 활성화를 위한 ‘데이터 3법’ 등 주요 민생경제 법안을 처리할 예정이었나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따라 각 당의 표정도 엇갈리고 있다. 민주당은 예기치 못한 사태에 허를 찔린 모습이다. 다음 달 상정이 예상되는 검찰개혁 법안 등에 대해서는 필리버스터가 전략상 ‘계산표’에 있었으나 이날은 전혀 예상치 못해서다. 민주당은 한국당의 필리버스터에 반발해 이날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개의 권한을 가진 문희상 의장의 결정에 따라 본회의를 열지 않거나 △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을 설득해 필리버스터 중단에 필요한 ‘재적 5분의3(177석)’을 확보해 이를 추진하는 등 대응 전략을 짜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당도 본회의 불참 의사를 밝힌 상태다. 대안신당은 ‘4+1’ 방식으로 필리버스터 반대에 뜻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한국당은 당리당략을 앞세워 민생 폐기도 서슴지 않고 있다”며 “이해찬 대표의 말처럼 역사상 이런 근본이 없는 정당은 없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유치원 3법과 민식이법, 데이터 3법이 필리버스터 대상일 수 있느냐”며 “용서할 수 없는 정치적 폭거를 단호히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
/안현덕기자 alway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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