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2월2일 미국 시카고대 미식축구 경기장 지하 핸드볼 연습장. 특별히 마련된 실험실에서 49명의 과학자들이 오전9시54분 CP-1(Chicago Pile-1)의 스위치를 켰다. 실험의 목적은 연쇄 핵 분열 실증. 순수 흑연으로 특별제조된 소형 흑연 벽돌 4만5,000개(400톤)에 둘러싸인 우라늄 5.4톤과 산화우라늄 45톤은 시간이 흘러도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점심을 위해 오전11시25분 중단된 실험은 오후2시에 속개됐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하지만 오후3시25부터 0.5와트의 전기를 생산해냈다. 연쇄 핵분열은 28분 동안 이어졌다.
최초 원자로의 성공에 대한 보고에서 사용된 은유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실험 성공 뒤 현장 실무를 책임진 아서 콥튼 시키고대 교수는 국방과학위원장에게 전화로 결과를 알렸다. ‘이탈리아 항해자가 신대륙에 상륙했다.’ 하버드대 총장으로 위원장직을 맡고 있던 제임스 코넌트 위원장은 ‘원주민들의 반응은 어떠냐’고 되물었다. 콥튼 교수는 ‘아주 우호적’이라고 답했다. ‘이탈리아 항해자’로 지칭된 인물은 연구의 총책임을 맡았던 엔리코 페르미. ‘원주민들의 반응’은 핵물질인 우라늄의 이상 작동 유무에 대한 질문이었다.
수많은 사전 회의를 통해 약속된 언어였으나 과학자들은 이탈리아에서 망명한 물리학자인 페르미의 핵분열 성공을 제노아 출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에 비견할 만큼 일대 사건으로 여겼다. 예상대로 최초의 원자로 CP-1을 통해 입증한 원자력의 힘은 세상을 바꿨다. 핵폭탄과 원자력발전소, 새로운 치료법이 나왔다. 연구비를 댄 미국 정부는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고문 자격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페르미는 1945년 7월 핵폭발 실험을 지켜보고는 ‘천 개의 태양보다 밝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페르미의 원자로 CP-1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작동하는 원자력발전소 457개(건설 중인 54개 미포함)의 선조다. 24개 원전을 보유(4개 건설 중)한 우리나라는 세계 6위의 원전국이지만 탈원전 논란이 한창이다. 값싼 전력을 위해 더 지어야 한다는 견해와 노후 원전의 안전과 폐로 대책이 시급하다는 입장으로 과학계마저 양분된 상태다. 원자력 개발 초기 미국과 정반대다. 원자력 개발에는 페르미뿐 아니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독일), 오토 프리슈(오스트리아), 폰 노이만, 레오 실라르드(헝가리) 등의 망명 과학자가 머리를 맞댔다. 이공계 학자들의 분열이 정치와 관련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타깝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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