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급에서 성장해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이들의 이름 앞에는 흔히 ‘샐러리맨 신화’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신화라는 거창한 단어가 따르는 이유는 흔하지 않아서다. 그러나 이 흔하지 않은 성공 사례가 조직원들에게 미치는 힘은 막강하다. 20대 신입사원도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있는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는 다르다. 당장 CEO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임원들은 물론 젊은 직원들에게도 크나큰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경영 원칙이 시중은행에서는 그간 잘 지켜지지 않았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은행·금융지주라는 단어와 낙하산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무수한 기사가 쏟아진다. 어느 정권이나 은행장, 금융지주 회장 자리는 챙겨줘야 할 인사들을 앉힐 보은의 자리였다. 행장·회장은 물론 부행장이나 임원이 되려면 청와대는 물론 서울 여의도에 줄을 대야 하는 흑역사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역사가 아닌 현재였다.
그중 대표적 은행을 꼽는다면 기업은행이었다. 기업은행이 첫 자행 출신의 행장을 맞이하는 데는 무려 3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1996년 기업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내부 승진으로 행장 자리에 오른 김승경 전 행장은 외환위기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두 번째 자행 출신 행장인 조준희 전 행장을 발탁하기까지 10년 넘게 기업은행 행장 자리는 기재부·한국은행, 금융 당국 출신 퇴직 관료들의 자리가 됐다.
흑역사를 뒤로 하고 어느덧 기업은행은 최근 9년간 3명의 자행 출신 행장을 배출했다. 공채시즌이 마무리되면 “행장이 꿈”이라는 패기와 열정으로 취업 관문을 통과한 신입 행원들의 이야기가 면접 후일담으로 늘 회자된다. 3월 취임 이후 처음으로 기업은행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은행 고위직을 물리고 젊은 직원들의 애로사항과 포부를 경청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만난 행원들 모두 미래 은행장도 꿈꿀 수 있는 인재들이다.
그런데 또 다시 기업은행은 오는 27일 현 김도진 행장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낙하산 투하설에 휩싸였다. 청와대가 인사 검증 중인 쇼트리스트 가운데 자행 출신 인사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설부터, 유효경쟁을 위해 자행 출신이 단 한 명 포함됐을 뿐이라는 설까지 패배주의가 뒤섞인 ‘카더라 통신’이 은행을 들쑤시고 있다.
초저금리와 경제성장률 하락으로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인 금융업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전문성을 갖춘 리더가 필요하다. 대형 정보통신 기업, 이른바 빅테크의 금융업 침투로 금융산업의 지형도가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할 리더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기업은행의 낙하산 행장 투하설이 더욱 우려되는 이유다.
지금 당장 서울 을지로 본점을 방문하면 기업은행의 미래를 짊어질 행원들의 염원을 알 수 있다. 로비를 가득 메운 플래카드는 이렇게 말한다. ‘함량 미달 낙하산 행장 반대한다’ ‘신 관치금융을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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