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9년 12월11일 새벽 콘스탄티노플. 거센 눈바람 속에 황후 처소에서 밧줄이 내려왔다. 궁에 잠입한 괴한들은 여인으로 변장한 채 환관의 안내를 받으며 암살 목표에 다가섰다. 침상 아래에 표범 가죽을 깔고 자던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칼을 반사적으로 피했으나 얼굴에 맞았다. 옛 부하 장군은 고통스러워하는 황제의 배신과 실정을 열거하며 걷어차고 수염을 잡아 뜯었다. 자객들이 돌아가며 원한을 털어놓은 끝에 황제의 턱이 부서지고 배가 갈렸다.
비참하게 생을 마쳤지만 니키포로스는 즉위 이전에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었다. 크레타섬을 아랍인에게서 되찾고 시리아로 진격해 연일 승리한 그를 영웅으로 여겼다. 니키포로스의 아버지도 유명했다. 전쟁 영웅인 그의 부친이 정치적 모함을 받으면 교회와 시민들이 나서서 구명했을 정도다. 963년 봄 25세 황제가 요절했을 때 병사와 시민들은 ‘니키포로스 황제 만세’를 외쳤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은 따로 있었다. 황후 테오파노.
전임 황제의 22세 미망인인 황후 테오파노는 전선에 있던 51세의 니키포로스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귀환을 요구하고 황제 자리에 올린 뒤 결혼했다. 두 아들의 보호와 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지만 젊은 황후는 군대와 종교밖에 모르는 중늙은이 남편과 정이 들지 않았다. 대신 고른 애인이 남편의 부하이자 총사령관인 요안니스 치미스키스. 28세의 황후와 44세 사령관의 불륜은 의외로 지지세력이 많았다. 군인으로서는 뛰어났던 황제가 어느새 누구나 싫어하는 인물로 변한 탓이다. 치미스키스를 새 황제로 옹립한 황후는 세 번째 황제 남편과 결혼하고 싶었으나 좌절되고 두 아들이 훗날 제위에 오르는 데 만족했다.
니키포로스 황제의 비문에 후대의 시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한때는 도검보다도 예리했던 그는 결국 한 여자와 양날 검의 희생자가 되었도다. 세계를 힘으로 잡았던…(중략)… 니키포로스, 모든 것을 파했으나 한 여자를 파하지는 못한 자여.’ 누구보다 기대받았던 니키포로스는 가장 아름다운 악녀였다는 테오파노 때문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을까. 글쎄다. 그렇게 보기에는 실정이 너무 크다. 갈수록 거만해져 불필요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연히 군비 지출이 크게 늘었다. 세수는 한정된 가운데 직계 군인만 챙겨 불만을 샀다. 결정적으로 국세와 국방력의 근간인 자영농 기반이 무너졌다. 물가의 세 배 폭등과 부익부 빈익빈 현상 심화가 정권교체를 부른 셈이다. 민심이 차면 배가 뜬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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