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외환위기는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김 전 회장이 1980년대 중반 “천시(天時 )와 인재(人才)의 만남이 오늘의 대우를 이뤘다”고 했지만 정작 외환위기는 그의 편이 되지 않았다. 문어발식 외형확장은 금융논리로 구조조정을 강제한 관료들과 충돌을 빚었고, 끝내 그룹을 해체당한 채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미국 등이 야생마처럼 세계 시장을 침식하는 그를 포획했다는 서방음모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무차별적 차입경영과 그에 따른 부실이 잉태한 국가적 손실에 대한 비판은 오롯이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김 전 회장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극단을 달린다. 하지만 자원 하나 없는 나라에서 세계를 무대로 뛰어다니면서 대한민국 브랜드를 알리겠다는 그의 열정은 오늘의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족적이다. 생전 한 특강에서 “개발도상국 한국의 마지막 세대가 돼 ‘선진 한국’을 물려주고 싶었다”고 한 말은 그가 삶 내내 간직했던 소망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고인이 일생을 통해 보여준 창조적 도전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밝힌 것은 그의 이런 꿈을 후배 기업가들이 물려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부 역시 김 전 회장의 타계를 계기로 글로벌 추세를 역류하는 규제의 족쇄로 발목을 잡을 게 아니라 기업들이 밖으로 눈을 돌려 뛸 수 있게 할 방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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