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국회의원 시절엔 문제의식은 대단히 왕성했으나 문제의 실체, 즉 그것을 해결하는 정책이 이뤄지는 과정과 그 정책이 실제 현장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정치로 돌아간다면 그것을 알게 된 사람으로서 좀 더 진중해지고 무겁게 정치를 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신문기자 21년, 국회의원 4선 16년, 지자체장 3년 그리고 국무총리 2년 7개월의 긴 여정을 지나온 이낙연 국무총리가 다음 행선지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 총리는 “국민이 갈증을 느끼는 건 정치에서의 품격, 신뢰감”이라며 “정글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만 모처럼 국민이 저에게 신망을 보여준 그런 정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돌아보니 아쉽지만 ‘정세균 지명’에 마음 편해”
이 총리는 지난 19일 저녁 세종시 총리공관에서 송년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이 총리는 “이제 곧 정부를 떠나야 하는 때가 되니, 그동안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의 무거움이 저를 짓누른다”며 “그래도 경륜과 역량과 덕망을 모두 갖추신 정세균 의원이 다음 총리로 지명되셔서 정부를 떠나는 제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총리는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할지는 구체적으로 정해지지도, 논의되지도 않았다”며 “그것을 제가 요청하거나 제안하기보다는 소속 정당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총리 재임 기간 얻은 여러 경험을 향후 행보의 밑거름으로 삼겠다는 뜻은 확실하게 밝혔다.
이 총리는 “기자 여러분이나 국회를 보면 제 과거가 생각난다”며 “정책이 간단하지 않다. 다시 정치로 돌아간다면 그것을 알게 된 사람으로서 좀 더 진중해지고 무겁게 (정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당내 기반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현장에서 또 나왔다. 그러자 이 총리는 과거의 정치와 현재의 정치는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총리는 “정치인에게는 조직 내 기반도 필요하지만 국민에 대한 호소력도 못지않게 필요하다”며 “후자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이 총리는 “어려운 시대를 건너가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면 그것을 작은 조직논리로만 접근하는 게 정치인의 임무에 부합할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성장 없어도 문제, 포용 없으면 공동체 어려워”
정치권과 내각이 동시에 주목해야 할 시대 정신으로는 ‘성장과 포용 동시 추구’를 꼽았다.
이 총리는 “과거 같은 고속 성장을 계속하기는 어렵겠지만 성장이 멈추면 내부에 잠재된 것이 한 번에 표출될 가능성이 있다”며 “자본주의란 자전거와 같아서 페달을 밟는걸 멈추면 쓰러진다. 그래서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한다. 속도가 더뎌도 페달은 계속 밟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총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성장은 격차를 키우고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제체제가 될 것”이라며 “그때 승자 편에 서지 못하는 분들 일시적으로 경쟁에서 밀린 분들, 그런 분들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바탕을 지탱해주는 역학, 그것이 포용”이라고 덧붙였다.
이 총리는 “성장이 없으면 여러 문제가 드러난다 했지만 포용 없이는 공동체도 지속 되기 어렵다”며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실용적 진보주의 관점에서 해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했고, 앞으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리는 “진보라는 건 앞으로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를 내야 하는 것이 실용”이라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안전 한국…배 사고 잇따를 땐 팔다리 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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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리는 지난 5월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서 ‘어떤 총리로 기억되길 바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이 총리는 “제 임기가 끝날 땐 ‘안전 대한민국이 진일보했다, 그 과정에서 이낙연이 일조했다’는 평가라도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이 총리는 재임 기간 재난·재해가 발생하면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갔다. 강원 고성 산불 때도 그랬고, 조류인플루엔자(AI)·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병했을 때도 그랬다.
이 총리가 현장에서 직접 듣고 본 건 관련 정책에 빠르게 수렴됐다. 불이 나면 소방차가 관할 구역을 넘어 달려가거나 특별재난지역의 범위를 시군구에서 읍면동까지 줄인 게 대표적 사례였다. 2018년 초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AI(조류인플루엔자)가 발병했을 때는 잠복기가 긴 오리 등의 사육을 일정 기간 중지하는 휴지기제도를 도입해 조기에 잡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웠던 사건·사고도 있다. 선박 어선 침몰, 블랙아이스 차량 추돌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 총리는 “이런 것까지 이런 것까지 완벽하게 대체해야 완벽한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하고 아쉬운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불과 일주일 새 선박 침몰 사고가 3차례 연달아 발생했을 때는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고 했다. 이 총리는 “지난 시간 힘겹게 달려왔는데…”라며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총리는 “무력감에 빠지는 건 책임자가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털고 일어났다”고 말했다.
“미래 변화 빠른데 우리 정치는 뒤를 본다”
그 동안 국무총리로서 많은 힘을 쏟았던 분야 중 하나가 규제 혁신과 사회 갈등 조정이었다. 4차산업 혁명 시대. 유례 없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기존의 규칙과 룰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타다 사태가 대표적이었다. 이 총리는 “타다의 문제는 그나마 제도권이 어렵사리 이룬 합의가 지금 상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타다 사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제2의 타다, 제3의 타다 문제가 나올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 총리는 “갈등은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해 조정할 수 밖에 없다”며 “그런 점에서 정부도 훨씬 노력하고, 국회도 조금 더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권에 대해 “국회 주요정당들이 접점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면 접점을 찾기가 쉬울 텐데 자꾸 자기 쪽을 보며 정치를 하다 보니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안타까워했다.
정치권의 미래지향적 태도를 거듭 주문했다.
이 총리는 “빠른 변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 크고 깊어진 갈등을 이해하는 능력,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텐데 우리 정치가 그 쪽을 보는지, 뒤를 보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우리 정치가 뒤를 보고 있다. 비정상이 빨리 극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 큰 신뢰와 배려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이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드러냈다. 정 총리 후보자가 지명되던 지난 17일에도 이 총리는 “대통령과 국민께 고마운 마음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이 총리에 대해 “매우 아쉽지만 이제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놓아드리는 것이 도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지난 여름 개각 당시에도 문 대통령은 이 총리의 뜻을 먼저 하문했다고 했다. 이 총리는 “대통령께서는 한 번도 빼지 않고 저를 ‘님’자를 붙여 불렀다”며 “참으로 감사한 일이 저를 많이 신뢰해주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문 대통령의 배려가 컸다고 강조했다. 이 총리는 문 대통령에 대해 “그 연세의 한국 남자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진중하고 배려가 많으신 분”이라고 거듭 말했다.
‘최장수 총리’라는 타이틀까지 얻으며 2년 7개월 동안 ‘제45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 문 대통령의 신뢰와 배려, 호흡이 큰 힘이었다는 뜻이다.
/세종=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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