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얄팍한 마음이 있어서 일찍 두각을 나타나게 됐다면, 자만하게 됐을 것 같거든요. 옛날엔 관객 반응이 좋은 연극을 하고 나면 어깨가 ‘으쓱’해졌어요. 젊은 시기에 방송까지 했으면 더 그랬을 것 같은데, 뒤늦게 사랑을 받고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침착해요. ”
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극본 임상춘·연출 차영훈)편견에 갇힌 맹수 동백(공효진)을 깨우는, 촌므파탈 황용식(강하늘)의 폭격형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이정은은 동백을 버린 엄마 정숙 역을 맡아 연기했다.
동백의 엄마 조정숙 역으로 시청자들을 펑펑 울린 이정은은 “이 좋은 사람들과 언제 또 만나서 작업을 할지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라며 “구수하고 정감 있고 거기다가 서스펜스와 로맨스까지 있는 이런 극을 여러분들에게 선보일 수 있어서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정숙은 어쩔 수 없이 동백을 버렸지만,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며 딸을 사랑해 왔던 어머니다. 뒤늦게 밝혀진 정숙의 서사는 반전 아닌 반전을 선사하며 시청자들을 참 많이도 울렸다.
이정은도 정숙이 이러한 과거사를 지닌 인물인지 모르고 ‘동백꽃 필 무렵’을 시작했다. 다만 연기를 하면 할수록 왜 임상춘 작가가 자신에게 정숙의 서사를 알려주지 않았는지 희미하게나마 이해했을 뿐.
“정숙의 전사를 모두 알고 연기를 한 건 아니었어요. 짐작으로 연기를 했죠. 배우가 많은 것을 알고 연기하는 것이 때로는 방해될 때가 있더라. 뭔가를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의 시작을 풀 수 있었어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퍼즐처럼 맞춰져서 깜짝 놀랐죠. ”
이정은은 정숙을 연기하며 실제 모친의 모습을 많이 따라 했다. 이정은의 모친 역시 ‘동백꽃 필 무렵’ 속 정숙을 보며 “너 내 모습을 모티브 삼았니”라고 할 정도였다고. 이정은은 “저희 어머니가 치매 연기를 잘한다. 복지관을 다니시면서 치매 환자분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고 뒷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나와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해 연기만 바라보고 달려온 이정은은 ‘기생충’부터 ‘타인은 지옥이다’, ‘동백꽃 필 무렵’까지, 올 한 해 배우로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세간에 다작 배우로 알려졌지만, 알고 보니 쉬지 않고 시대와 호흡하는 배우였다. 그를 대중들에게 널리 소개한 작품은 ‘오 나의 귀신님(오나귀)’이다. 그는 당시에 시청자들이 자신을 “친구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다고 했다.
“TV에 잘 생긴 남자, 예쁜 여자 배우만 나오면 너무 재미 없지 않을까요. 저 같은 사람도 나와야 시청자들도 여러 가지 기호를 가지고 즐길 수 있죠. ‘오나귀’ 때 친구처럼 느껴지는 배우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들이 나 같은 친구를 필요로 하는구나’ ‘배우로서 좋은 친구가 되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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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반가운 배우’, 그리고 ‘믿고 보는 배우’가 되기까지 이정은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하며, “천운 덕분이다”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배우의 80프로 정도는 운이 작용한다. 저 때문이라고 생각 안 한다. 운 있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이 최고의 운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냥 제가 빨리 성공하지 않아서 인지 연기가 고민이 됐어요. 처음엔 발 연기를 했어요. 공부는 하면 결과가 금방 나오지만 연기는 결과가 금세 나오지 않으니까 애가 닳는 것 같아요. 근데 또 제가 열심히 연구해서 내놓은 걸 사람들이 좋아하면 좋더라고요. 어렵지만 연기를 계속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배우에게 건강한 정신을 갖게 해준 건 ‘산책’ 덕분이라고 했다. 친한 지인들과 산책을 즐겨 하는 그는 “1시간 30분 정도 도란 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걸으면 우울감이 금새 사라진다”고 경험담을 털어놨다.
이정은은 출연하는 작품마다 그가 어떤 역할을 보여줄지 궁금증을 갖게 만든 묘한 매력이 있는 배우다. 그런 이정은에게도 롤 모델이 있다. 일본 배우 키키 키린이다. 그는 “묘한 멘토시다. 워낙 좋아해서 그분에게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다”고 말했다.
이정은의 목표는 ‘하루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 이다. 명예와 영광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연애할 때 연애에 ‘집중’하는 편이라 작품을 못한다는 비밀도 귀띔했다. 그렇기에 다작을 해나갈 땐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언의 암시도 함께 말이다.
“매일 매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어요.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사실 장기적인 계획을 안 내놓는 편이에요. 하루가 안 쌓이면 일 년이 안되니까. 하루하루 잘 살아냈으면 좋겠어요. 상을 받음 어머니에게 갔다드려요. 집이 좁은 것도 있지만, 일부러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저는 제가 간사한 것 같아서 ‘초짜’처럼 하는 게 좋아요. 호호호”
[사진=양문숙 기자]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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