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2020시즌 신인 손유정(19·볼빅)은 2019년을 “매주 가족여행을 떠났던 한 해”라고 정리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건축을 전공한 어머니가 미국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면서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2018년에 LPGA 투어 퀄리파잉 토너먼트를 통해 2부 투어카드를 땄고 지난해 전체 24개 중 23개 대회를 뛰었는데 요리를 담당하는 어머니, 운전과 캐디를 맡은 아버지가 늘 함께했다. 세 식구는 집 없이 숙박공유 서비스를 이용해 떠돌아다녔다. 어머니 남미자씨는 “재작년까지 오클라호마에 살다가 집을 정리했다. 큰애는 한국에 있고 우리 부부는 계속 (손)유정이와 같이 다닐 거여서 굳이 집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플로리다주에서 캘리포니아주까지 30시간을 차로 이동한 적도 있었다. 하필 2부 투어 첫 4개 대회를 연속 컷 탈락하던 때였다. 손유정은 “차 안에서 괜스레 신경질을 부린 적도 여러 번인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한 기억”이라며 “엄마·아빠가 더 힘드셨을 텐데 한결같이 응원해주셨다. ‘이제 시작이니까 괜찮다’ ‘편하게 쳐도 된다’는 격려에 저도 모르게 힘을 냈다”고 돌아봤다. 부산 출신의 어머니 남씨는 “마, 몸풀기다, 유정아. 올라갈 끼니까 걱정 마라”고 딸을 다독였다고 한다. 손유정도 우리말을 할 때 부산 말씨를 쓴다.
한 시즌에 23개 대회나 뛴 선수는 손유정뿐이었다. “골프를 시작할 때부터 워낙 LPGA 투어에서 뛰고 싶었어요. 돌아갈 집도 없고 하니까 대회 끝나면 또 대회에 나간 거죠.” 그렇게 약 5만7,300달러를 벌어 시즌 상금 상위(20위) 자격으로 지난해 퀄리파잉 최종전으로 직행했고 공동 30위에 올라 1부 진출의 꿈을 이뤘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따라 골프를 시작한 손유정은 입문 6개월 만에 또래 대회에서 언더파를 칠 정도로 소질을 보였다. 11세에 US키즈골프 올해의 선수상을 시작으로 13세 때는 오클라호마주 여자아마추어챔피언십 최연소 우승 기록을 썼다. 2018년에는 롤렉스 여자주니어챔피언십을 제패하면서 미국아마추어골프협회(AJGA) 랭킹 2위에 이름을 올렸다.
롤렉스 대회 우승 선배이기도 한 박인비가 우상이라는 손유정은 ‘올해 대회장에서 자주 만나겠다’는 말을 건네자 입을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최근 한 행사에서 박인비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도 “너무 큰 존재로 느껴져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바라만 봤다”는 그는 “골퍼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존경한다. 더 많이 알아가고 싶다”고 했다. 과거 박인비가 신기의 퍼트와 쇼트게임을 앞세워 노스텍사스 슛아웃 대회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손유정은 이후 새벽 훈련을 자청했다고 한다. 학교 가는 길에 연습장에 들러 매일 1시간 가까이 퍼트와 쇼트게임을 갈고닦았다. 그 결과 그린 주변 60도 웨지 샷이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는 샷이 됐다.
손유정은 유수 대학들로부터 입학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어릴 때부터 빨리 프로 전향해 큰 무대에서 뛰는 계획이 있었다”는 그에게 대학 입학 포기는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고교는 첫해만 학교를 다니고 이후 인터넷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다.
드라이버 샷 평균 260야드의 손유정은 지난해 길지 않은 프로 무대 적응기를 마친 뒤 6월부터 뚜렷한 성적을 냈다. 준우승을 두 번 했는데 둘 다 상금이 큰 대회였다. 앞서 달리다 뒤집힌 2위가 아니라 뒷심을 발휘해 쑥 올라간 2위였다.
최근 전남 해남에서의 4주 체력 훈련을 통해 하루하루 몸이 변하는 경험을 했다는 손유정은 다음달 호주 빅 오픈으로 데뷔 시즌을 시작한다. 2018년 지역 예선을 통과해 한 번 경험해봤던 US 여자오픈 출전을 가장 기대하고 있다. 드라이빙 레인지 뒤에 관중석이 있다는 자체가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신인상도 목표 중 하나지만 그것보다 성실하고 변함없고 꾸준한 선수가 되는 게 목표”라는 손유정은 지난해보다 훨씬 더 즐거울 또 한번의 긴 가족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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