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8월 군 입대를 앞두고 일본으로 자전거 일주를 떠난 대학생 A씨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소식을 접한 나고야총영사관 소속의 김영근 영사(경감)는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A씨의 부상 정도를 확인한 김 영사는 현지 경찰과 보험사로부터 사고 경위를 파악한 뒤 한국에 있는 피해자 가족에게 연락을 취했다. 병원을 찾은 가족들과 의사의 통역을 돕는 것은 물론 경찰서에 동행, 사고처리 업무까지 모두 김 영사의 몫이었다. 덕분에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A씨는 두 달 만에 가족들과 함께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연간 해외여행객 수 3,000만명 시대. 우리 국민 5명 중 3명꼴로 매년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는 뜻이다. 해외여행객이 늘면서 세계 곳곳에서 우리 국민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고 있다. A씨처럼 낯선 이국땅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범죄에 휘말릴 경우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이들은 현지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파견된 경찰주재관이다. 전 세계 32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찰 주재관들은 재외국민보호와 국제범죄 공조수사를 담당한다. 외교부 사건·사고 영사와 경찰청 외사협력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셈이다. 특히 이들은 일반 영사와 달리 사건·사고 처리 경험이 풍부한 장점을 십분 활용해 우리 국민이 범죄피해를 입었을 때 현지 경찰과의 유기적 협력을 토대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최근에는 우리 경찰의 우수한 인력과 선진 치안 시스템을 해외에 알리는 ‘치안 한류’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다.
재외국민 보호·도피사범 검거…1인다역 소화
현재 49개 해외공관에 54명이 파견돼있는 경찰주재관들은 현장수사와 생활안전 등의 분야에서 최소 10년 이상의 근무경력을 갖춘 베테랑들이다. 매년 상·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선발되는 경찰주재관의 내부 경쟁률은 5대1에 달한다. 이들은 경찰청과 이민청 등 현지 법집행기관들을 수시로 찾아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 교민 의견을 수렴하고 현지 교정시설에 수감된 국민들을 면회해 법률적 조력과 인권침해 여부 등을 점검한다.
특히 절도나 강도 등 대부분의 강력사건이 심야에 발생하는 만큼 퇴근 이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실제로 필리핀대사관의 이수복 영사(경감)는 2017년 5월 현지 카지노에서 중국인 사채업자에게 우리 국민이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필리핀 경찰들과 이틀 밤을 지새우며 피해자 위치를 추적한 끝에 납치범 3명을 검거하고 피해자도 구출할 수 있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우리 관광객들이 현지 조직폭력배들에 납치돼 금품을 빼앗긴 사건도 경찰주재관이 발로 뛴 덕분에 사건 2년 만에 피해금 전액을 돌려받게 됐다.
해외로 도피한 범죄자들을 검거해 단죄를 받게 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2017년 12월 ‘한국판 콘에어’라고 불리며 필리핀으로 도피한 수배자 47명을 전세기를 통해 국내로 송환한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에 파견된 경찰 코리안데스크와 필리핀 사법기관의 공조 덕분이었다. 이 영사는 “현지 기관과의 공조로 국외도피사범들을 적극 검거해 송환함으로써 더 이상 필리핀이 범죄자의 안전한 도피처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부터 3개월간 최초로 우리 경찰청이 주도한 ‘인터폴 국제범죄 합동단속 프로젝트’를 통해서는 국외도피사범 241명이 붙잡혔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국내로 송환되는 도피사범은 2014년 148명에서 지난해 401명으로 5년 새 170%나 급증했다. 경찰청 외사국의 한 관계자는 “국외도피사범은 해외 교민들을 상대로 추가 범죄를 저지를뿐더러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해 국격 저하의 요인이 되고 있다”며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한국에서 죗값을 받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선진수사기법 전수…‘치안 한류’로 국위선양
해외 곳곳에서 활동 중인 경찰주재관들은 한국 치안시스템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치안 한류 전도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주재관들을 통해 한국의 치안시스템을 처음 접한 해외 치안당국자들은 자국에 한국 경찰을 파견해달라는 러브콜을 잇따라 보내고 있다. 태국대사관의 조정미 영사(경정)는 “한국 경찰의 선진 수사기법을 바라보는 태국 경찰의 부러운 시선을 몸소 느끼고 있다”며 “한국 경찰의 수사시스템을 직접 배우며 교류하고 싶다는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아랍에미리트(UAE) 경찰은 전수받고 싶은 수사기법 목록까지 일일이 적어가면서 자국 경찰의 교육을 맡아줄 한국인 전문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할 정도다.
이에 경찰청도 중동과 중남미·동남아 등 개발도상국들에 한국형 치안시스템을 전수해주는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해외 33개국에 156차례에 걸쳐 428명의 경찰 전문가들을 보내 첨단수사기법과 노하우를 전수했다. 또 해외 107개국 2,448명의 치안 담당자들을 국내로 초청해 153개 과정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최근에는 한국의 앞선 과학수사기술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우리 과학수사 교관들의 해외 파견도 늘어나는 추세다. 베트남과 온두라스 등에서는 우리 경찰이 전수해준 폐쇄회로(CC) TV 분석 및 감식기법이 현지의 강력범을 검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치안 한류는 국내 기업의 장비수출로 이어지면서 경제적 부가가치까지 창출하고 있다. 중남미와 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을 대상으로 한국형 CCTV 시스템과 순찰차·과학수사키트 등을 수출하는 등 총 440억원 규모에 달하는 치안사업을 진행 중이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치안시스템이 새로운 수출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며 ‘케이캅 웨이브(K-cop wave·한국경찰의 물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경찰청 외사국 관계자는 “현지 경찰과의 유기적 교류를 통해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높이는 것은 물론 우리 교민이나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범죄피해 느는데 주재관 수는 7년째 제자리
우리 국민과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늘면서 이들을 보호해야 할 경찰주재관 수요는 급증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해 해외여행객 수가 처음으로 3,000만명을 넘어서고 해외거주 재외동포도 750만명에 달할 정도로 이제 전 세계 어디서든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세상이다. 하지만 해외 184개 공관 중 경찰주재관이 상주하는 곳은 49개(26.6%)에 불과하다. 해외공관 4곳 중 3곳은 경찰주재관이 없다는 의미다. 해외 모든 공관에 경찰이 파견된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또 미국과 중국·일본·러시아·베트남·필리핀 등 6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26개국들에서는 단 1명의 주재관이 전체 교민과 관광객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경찰주재관 정원은 2012년 한차례 증원된 후 지난 8년째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재외국민의 범죄피해자 수는 2015년 4,062명에서 2018년 5,214명으로 3년 새 30% 가까이 늘었다. 더욱이 내년 재외국민보호를 위한 영사조력법 시행을 앞둔 상황에서 경찰주재관 증원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이들의 업무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매년 국외도피사범이 늘고 있는데 정작 이들을 잡을 주재관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관계부처들은 증원논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청은 베트남 다낭과 미얀마·대만 등에 주재관을 신규 파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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