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권 조정은 광복 직후 70년 넘게 검경 갈등의 오랜 불씨가 돼온 주제다. 1945년 미 군정 초기 경무국으로 창설된 경찰은 ‘미군정청 법무국훈령’에 따라 일시적이나마 독자적 수사권을 가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경찰의 권력남용에 대해 국민 여론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법률가들의 반발까지 가세하며 1948년 검찰청법에 ‘경찰은 범죄수사에 있어 검사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명시됐다. 검경이 상명하복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후 1954년 제정된 형사소송법을 통해 검사의 수사·기소권 독점이 명문화되면서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는 지난 66년간 경찰의 숙원이 됐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경찰행정개혁심의회와 국회에서 경찰에 1차 수사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는 했지만 이듬해 벌어진 5·16 쿠데타로 무산됐다.
수사권 조정 논의가 다시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여야의 첫 정권교체가 이뤄진 김대중(DJ) 정부 시절이었다. 1999년 DJ 정부는 자치경찰제 도입 논의와 함께 수사권 조정 추진을 공개 선언했다. 하지만 검경이 각자 입장을 고집하며 한 달 넘게 긴장이 고조되자 결국 청와대가 나서 수사권 조정 논의를 중단시켰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수사권 조정 이슈는 노무현 정부 들어 다시 공론화 작업이 시작됐다. 2004년 ‘검경 수사권조정협의체’와 ‘수사권 조정 자문위원회’ 등 관련 협의체가 잇따라 출범했지만 합의안 도출에는 실패했다. 2005년 취임한 허준영 당시 경찰청장이 “지구에 없는 단 두 가지는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와 한국 경찰의 수사권”이라며 검찰과의 전면전을 선포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수사권 독립을 강하게 밀어붙이던 허 청장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위 농민이 사망한 사건에 책임지고 물러나면서 동력이 떨어졌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는 되풀이됐다. 정권교체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등으로 검찰수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2011년 경찰의 수사개시권을 명시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이 통과되자 당시 김준규 검찰총장은 이에 반발해 사퇴하기도 했다. 이후 정부는 ‘경찰 내사 권한은 보장하되 내사 종결 이후에는 검찰 통제를 받도록 한다’는 강제조정안을 마련했다. 박근혜 정부도 검경의 합리적 역할 조정 방안을 국정과제로 내세웠지만 법무부와 검찰이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면서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다. 이후 2017년 19대 대선에서도 5개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들 모두 검경 수사권 조정을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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