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1월22일 오후4시30분 로크스 드리프트. 오늘날 남아공 중동부인 이곳의 영국군 중계 기지에 줄루족 전사 4,000여명이 들이닥쳤다. 작은 병원과 보급기지로 구성된 로크스 드리프트에 주둔하던 영국군 진영에는 공포가 스쳤다. 연대 규모의 영국군이 줄루족 2만명에게 전멸한 이산들와나 전투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직후여서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지도상 직선거리로 11㎞ 떨어진 이산들와나에서 탈출해온 원주민 기병 부대가 합류해 영국군은 400여명으로 늘어났으나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원주민 부대가 병영을 이탈한 탓이다. 병력이라고는 영국군 24보병연대 2대대 B중대 소속 139명 등 154명만 남았다. 환자 30명은 전력에 도움이 안 됐다. 마침 소령 계급의 영국군 지휘관도 자리를 비운 상황. 지형도 불리했다. 사방이 고지대로 둘러싸인데다 개활지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34세와 32세의 영국군 중위 두 사람이 옥수수자루와 보급품 상자로 건물과 건물을 잇는 원형 진지를 급하게 구축했다. 16시간 동안 계속된 전투 결과는 영국군의 신승. 24보병연대 예하 6개 중대가 박살 난 이산들와나 전투와는 반대로 줄루족 전사들을 물리쳤다.
사상자 수는 영국군 사망 17명, 부상 15명에 줄루족 사망 약 600여명으로 압승인 것 같았지만 함락 위기를 수차례 넘긴 사투의 연속이었다. 총신이 휘어지고 청동제 탄창이 갈라지며 탄약이 떨어질 무렵 줄루족이 물러나지 않고 마지막 공세를 펼쳤다면 전멸할 수도 있었던 전투였다. 영국군 내에서 이 전투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영국 언론은 이산들와나 전투는 미개한 야만족의 학살로, 로크스 드리프트는 정의의 위대한 승리라며 대서특필했다. 참전용사들에게는 빅토리아 훈장이 11개나 수여됐다.
짧은 순간의 단일 전투에서 가장 많은 수훈이 나간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를 두고 가넷 울즐리 중장은 “이산들와나의 패전을 감추기 위해 쥐새끼처럼 건물에 갇혀 목숨을 구한 자들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혹평했으나 정작 자신이 줄루 전쟁 총사령관을 맡고는 병력과 병참을 크게 늘렸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줄루 전쟁 이후 연발식 소총과 기관총 개발에 적극 나섰다. 영국이 창을 든 원주민과 대규모 전쟁에 나선 진짜 이유는 경제적 야욕에 있었다. 전쟁 직전 발견된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 지배권을 확보하고 도시에서 내쫓은 네덜란드계 원주민(보어인)들을 회유할 땅을 얻으려 시작한 전쟁은 강성했던 줄루 왕국을 16개 지역으로 쪼개는 결과를 낳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