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직권남용죄의 적용 범위를 좁히는 새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연루된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 2심 재판을 다시 받게 됐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에 법리오해와 심리미진이 있다며 파기환송을 결정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법리오해는 해당 법률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심리미진은 혐의에 대한 심리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김 전 실장 등은 박근혜 정부 시절 진보성향의 문화예술계 인사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사례는 그간 ‘적폐수사’ 등에 적용된 직권남용죄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놓은 최초의 판단입니다. 이전까지 직권남용죄는 대법원 소부에서 선고해왔는데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대법관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합의체까지 열어 다루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직권남용죄에 대한 전향적인 판단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습니다.
직권남용죄는 그간 입증이 까다로워 하급심마다 법원의 해석이 엇갈렸습니다. 형법 제123조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각 조항의 해석을 놓고 일선 재판부에서도 판단이 매번 갈렸습니다.
대법원은 이번에 블랙리스트 사건의 직권남용 혐의를 판단하면서 직권을 남용했더라도 의무가 없을 일을 하게 했는지까지 입증해야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우선 김 전 실장이 청와대 참모와 문화부 공무원에게 블랙리스트 대상자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고 지시한 것은 직권남용이기에 유죄로 봤습니다. 이 지시로 인해 문화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소속 직원이 실제로 지원을 배제한 것도 직권남용이어서 유죄로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산하기관 직원이 수시로 상부에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각종 명단을 송부한 행위는 공무원 본연의 업무에 포함된 것이어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며 파기환송을 결정했습니다. 기존 판례대로라면 직권남용 여부만 판단해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에게 의무가 아닌 일을 하도록 시켰다는 것까지 입증해야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대법원은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정책집행은 다른 공무원, 부서, 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를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통상적“이라며 ”이러한 관계에서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등 요청에 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대법원이 파기환송을 결정했지만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에 직권남용 혐의가 무죄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 가지 주요 직권남용 혐의 중 나머지 하나에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 다시 살펴보라고 주문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급심에서 이번에 대법원이 지적한 직권남용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의 형량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고 2심에서는 징역 4년을 선고습니다. 조 전 장관은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지만 2심에서 징역 2년을 받았습니다.
앞서 이른바 ‘서지현 검사 보복인사’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안태근 전 검사장이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를 받은 것도 직권남용을 판단하는 기준인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검찰은 안 전 검사장이 검사 인사를 담당하는 부하 검사에게 서지현 검사에게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인사안을 작성한 것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담당 검사가 의무 없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직권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이 직권남용죄에 대한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면서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을 진행 중인 하급심 재판부의 판단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삼성 뇌물’ 사건에서 직권남용 혐의가 다른 혐의와 함께 적용됐습니다.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의 미국 소송에 공무원을 동원한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대통령도 1심에서 직권남용 혐의는 무죄를 받았지만 검찰의 항소로 2심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법원행정처를 통해 일선 판사의 뒷조사를 한 것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현 정부 인사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무하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이번에 대법원이 직권남용의 기준을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검찰로서는 재판부를 설득해야 하는 부담이 늘어났습니다.
다만 대법원이 이번에 직권남용죄에서 ‘직권’과 ‘남용’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그간 법조계에서는 직권남용을 판단할 때 어디까지가 직권이고 월권인지 구분하기 모호하다는 지적을 꾸준히 제기해왔습니다. 공무원에만 해당하는 직권남용죄의 특성상 해석에 따라 직권이 될 수 있고 월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용에 대한 기준 역시 광범위해 앞으로도 논란은 계속 될 전망입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기존에는 직권을 남용했다는 증거만 있으면 바로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직권 남용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의무가 아닌 일을 했는지 증명해야 하기에 검찰 입장에서 혐의 입증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특히 정권 교체 후 이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보복용으로 자행됐던 직권남용죄가 등장하는 비중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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