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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이예랑 "스포츠 에이전트 생명은 믿음...유망주 은퇴까지 동행하는게 꿈"

<'한국의 보라스' 이예랑 리코스포츠에이전시 대표>

공중파 라디오 DJ 등 방송인서

국내 대표 '야구 에이전트' 길로

윈터미팅서 명함 돌리며 눈도장

김현수 MLB행·양의지 FA 성사

최근엔 안치홍 롯데 이적도 도와

투명성·신뢰 바탕 선수들과 소통

한단계 성장할때 가슴 뜨거워져

운동 열심히해 환갑까지 일할것







스포츠 에이전트(대리인)의 삶을 다룬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경기 중 뇌진탕을 일으켰다가 병실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한 선수가 자신의 에이전트인 맥과이어를 보자 갑자기 흥분한다. 다음 경기를 뛰어야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서는 맥과이어를 선수의 어린 아들이 복도에서 멈춰 세운다. 꼬마는 벌써 네 번째 뇌진탕인데 이제 좀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 어린 물음을 던진다. 맥과이어는 탱크 다섯 대가 와도 끄떡없는 사람이 네 아빠라고 안심시키지만 꼬마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드는 욕설을 날리자 이내 회의감에 빠진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이 장면은 이예랑 리코스포츠에이전시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신이다.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머리가 복잡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모처럼 얻은 휴식 시간에 습관처럼 이 장면을 튼다. “처음 이 일에 뛰어들었을 무렵에는 좋은 에이전트라면 저 상황에서 ‘스톱’을 얘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경력이 쌓일수록 ‘과연 그게 맞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거 있죠.”

이 대표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와 국내프로야구(KBO 리그) 공인 에이전트 자격을 모두 취득한 최초의 스포츠 에이전트다. 지난 2015년 김현수의 MLB 볼티모어 구단 계약과 2018년 강정호의 피츠버그 계약 성사 등을 통해 이름을 알렸고 최근에는 KBO 리그 정상급 2루수 안치홍의 롯데행을 도와 또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KBO 최초로 계약서에 ‘옵트아웃(계약 주체가 잔류 대신 계약의 소멸을 결정하는 권한)’ ‘바이아웃(구단이 계약 연장 포기를 결정할 때 선수에게 주는 보상금)’처럼 MLB에서나 볼 수 있던 조항을 넣어 깜짝 계약을 성사시킨 주인공이 바로 그다. 지난달 말 입단식에서 이 대표는 선수·단장과 나란히 앉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에이전트가 선수 입단식에 동석하는 것은 국내에서는 드문 풍경이다.

서울 강남의 리코스포츠 사무실에서 만난 이 대표는 “롯데 단장님이 ‘같이 고생했으니 입단식 때 나란히 앉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장난인 줄 알았다”며 “에이전트는 뒤에서 뛰는 직업이지만 그런 자리를 통해 리그 구성원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고 돌아봤다. 국내 야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계약 내용에 대해서는 “시장 분위기가 리스크를 최대한 피하는 쪽으로 흐르던 터라 구단·선수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접점을 찾았다. 무엇보다 선수의 도전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계약에 이르기 전 다른 후보 구단이 어디였는지, 공개된 내용 외에 세부 계약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의 추가 질문에 이 대표는 “절대 말할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는 “공개가 합의된 내용 외의 얘기를 에이전트가 외부에 흘리는 것은 선수와 구단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라며 “직원들에게도 소속 선수들의 얘기를 어디 가든지 절대 가십거리로 삼지 말라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계약서 중 각별하게 비밀이 유지돼야 하는 항목은 금고에 따로 보관한다. “직업 윤리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이유로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할 때가 있는데 한 사람의 잘못으로 같은 직업을 가진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볼 때가 많거든요. 직업의 특수성과 관련해 직업윤리가 필요하고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회사를 세우며 내건 핵심가치 1·2번도 투명성과 신뢰다. 이 대표는 “스포츠가 정말 매력적인 이유는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겨룬 뒤 승부를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일도 선수와의 소통, 파트너사와의 업무 등 모든 관계에서 가장 지켜져야 할 가치가 투명성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투명성과 신뢰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정보공유”라며 “선수가 대리인을 고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더 벌기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다양한 상황에서 그때마다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이 크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숨김없이 알려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선수가 듣기 싫어하는 얘기를 꺼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이 대표는 “‘네가 내 동생이고 친구라고 가정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며 운을 뗀다”고 한다.



에이전트는 구단과 협상·계약, 개인 스폰서십 유치 등의 업무 말고도 가족 문제 등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까지 관여해야 할 때가 많다. 시즌 중에 트레이드되면 집을 팔고 이사하는 문제까지 앞장서 도와야 한다.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 같다는 물음에 이 대표는 “모든 일이 결국 선수가 마음 놓고 운동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고 했다. “믿음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는 뜻의 ‘트러스트 이즈 언드(Trust is earned)’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업무에 있어 신뢰를 주고 일상에서 의지가 될 수 있게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에이전트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겨우 7년째지만 이 대표는 국내에서 최다 고객을 보유한, 가장 성공한 야구 에이전트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야구 팬들은 그를 MLB ‘슈퍼 에이전트’인 스콧 보라스의 이름을 따 ‘한국의 보라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라스는 올겨울 자유계약선수(FA) 계약 수수료로만 600억원 넘게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도 2018년 12월 양의지(NC)의 4년 125억원, 이재원(SK)의 4년 69억원 계약 등을 성사시켰다. 수수료가 5% 안팎이니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을 것 같다. 리코스포츠 소속 선수는 야구·축구·골프·e스포츠 등 90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 대표는 “처음 몇 년간은 매년 적자였고 최근에야 회사를 제법 탄탄하게 운영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수수료 자체도 한꺼번에 들어오는 게 아닌데다 선수가 성장해서 가치를 인정받을 때까지 몇 년간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외국어고를 나와 미국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한 이 대표는 에이전트의 길로 들어서기 전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일했다. 2012년에는 SBS 라디오 오디션을 통과해 ‘여러분의 국민DJ 이예랑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1년 정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이 대표는 방송가가 아닌 MLB 윈터미팅에 있었다. 윈터미팅은 전 구단 임원과 에이전트 등 관계자들이 모이는 MLB의 연례행사다. 이적·계약도 이곳에서 활발하게 이뤄진다. 진로를 바꾼 지 얼마 안 된 ‘초짜’ 시절, 이 대표는 회의장을 오가는 모두에게 닥치는 대로 자신을 알렸다. 나흘간 돌린 명함만 두 통 반이었다. 대학원 시절에는 일면식도 없던 MLB 구단 임원과 선배 에이전트들에게 밤낮으로 메시지를 보내 조언을 구하고 정보를 얻었다. “처음 윈터미팅을 갔을 때는 ‘뻘쭘’ 그 자체였죠. 하지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묻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좋게 봐주시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생기더라고요.”

열렬한 야구 팬이던 이 대표는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긴 몇몇 선수의 야구장 밖 일들을 도와주다가 아예 그 일을 직업으로 삼은 케이스다. 하지만 우연만으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릴 적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는 소니·혼다 광고만 보였는데 얼마 지나니 삼성·현대 같은 한국 기업 광고가 등장해 나도 모르게 뿌듯해했던 기억이 있다”면서 “스포츠도 더 많이 해외에서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가능성 있는 선수들이 보다 큰 무대에 진출해 더 많은 한국민이 뿌듯함을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치열해서 재미있다는 이 대표는 “선수가 한 계단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그 자체로 가슴 뜨거워지고 다시 힘을 내는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그의 꿈은 이제 막 유망주 소리를 듣기 시작한 어린 선수들이 은퇴할 때까지 에이전트로서 곁을 지키는 것이다. “적어도 환갑까지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일하려면 제 체력도 잘 챙겨야겠죠? 운동을 더 많이 할 겁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

She is…

△2001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커뮤니케이션 학사 △2014년 서던캘리포니아대(USC) 대학원 커뮤니케이션 석사, 리코스포츠에이전시 법인 설립 △2015년 김현수 MLB 볼티모어와 2년 700만달러 계약 △2016년 MLB 공인 에이전트 자격 취득 △2018년 KBO 리그 공인 에이전트 자격 취득, 양의지 KBO 리그 NC와 4년 125억원 계약, 이재원 SK와 4년 69억원 계약 △2020년 안치홍 KBO 리그 롯데와 2+2년 최대 56억원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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