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정년은 만 65세입니다. 일반 공무원(만 60세)이나 교사(만 62세)보다 길고 검사(만 63세)보다도 2년 늦게 퇴직할 수 있습니다. 임기 6년이 보장되는 대법관 14명의 정년은 만 70세입니다.
판사의 정년이 긴 것은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동의한 결과입니다. 직업 안정성을 충분히 부여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내려 달라는 기대가 담겨 있죠. 문제 있는 판사를 걸러내기 위해 10년마다 법관 재임용 심사라는 견제장치를 두긴 했지만 탈락하는 판사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사직하지 않는 이상 판사는 통상 2~3년 주기로 재판부를 옮깁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 어디로 인사 발령이 나는지는 판사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판사뿐만 아니라 사건당사자도 재판부 변경에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점입니다. 재판부가 바뀌면 사건을 다시 심리해야 하고 선고도 늦어질 수밖에 없어서죠.
때문에 권력형 비리 같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끄는 사건은 가능한 빨리 선고를 내리기 위해 재판이 끝날 때까지 재판부를 그대로 두는 것이 관례입니다. 재판부가 바뀌었다고 판결이 바뀌어서는 안 되겠지만 판사마다 성향과 관점이 다르기에 재판 결과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판사 인사를 책임지는 사법부 수장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올해 법관 정기인사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재판장을 교체하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건을 맡은 재판장을 유임시키면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현 정권의 권력형 비리 의혹을 둘러싼 재판은 늦어지고 사법 적폐 등 전 정권 관련 재판 진행은 속도를 내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입니다.
올해 법관 정기인사를 단행한 법원행정처는 여성 법관과 경력 법관을 대거 임용하는 탕평 인사를 단행했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사법부가 인사권 행사로 김 대법원장의 친정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지난 6일 법원행정처는 지방법원 부장판사 이하 법관 정기인사 명단을 발표하고 922명에 대한 전보인사를 24일자로 단행했습니다. 직책별로는 지방법원 부장판사 386명, 고등법원 판사 56명, 지방법원 판사 480명입니다. 퇴직 법관은 31명으로 예년과 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다는 게 법원행정처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조 전 장관의 부인 정 교수의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 송인권 부장판사가 전격 교체되면서 뒷말이 무성합니다. 송 부장판사는 지난 2017년 2월 서울중앙지법에 부임해 만 3년째 근무했습니다. 통상 2~3년을 주기로 인사 이동이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건을 맡은 재판장을 교체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지적입니다.
정 교수는 사모펀드 투자와 입시비리 혐의로 검찰에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정 교수 재판장이 이번에 바뀌면서 1심 선고는 일러야 총선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중요 사건을 놓고 정권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일명 ‘드루킹’ 사건으로 1심에서 실형을 받은 김경수 경남지사의 항소심 재판부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김 지사 사건의 재판장인 차문호 서울고법 형사2부 부장판사는 잔류했지만 같은 재판부 소속 최항석 판사가 광주고법으로 발령났습니다. 김 지사의 항소심 선고는 지난해 12월 나올 예정이었지만 재판부 내부에서 김 지사의 범죄 혐의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일정이 늦춰졌습니다.
반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임 전 차장 사건의 재판장인 윤종섭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 부장판사는 유임됐습니다. 윤 부장판사는 2016년 2월 부임해 만 4년째 서울중앙지법에서 근무했습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사법개혁을 기치로 내건 김 대법원장이 적폐 사건을 심리해온 판사는 남기고 현 정권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장을 교체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법원 인사를 총괄하는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에는 진보성향 판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 다시 내정됐습니다. 전임 김영훈 심의관이 서울고법 판사로 복귀하고 대전지법 안희길 판사가 신임 심의관으로 임명됐습니다. 법원의 핵심 요직인 인사총괄심의관에 또 다시 김 대법원장 측근이 내정되면서 판사 줄 세우기와 편 가르기가 심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김현 변호사는 “온 나라를 반복과 갈등으로 내몰았던 정경심씨 담당 판사는 교체하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의혹을 심리하는 법관을 잔류시킨 것은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인사”라며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사법행정을 실천하겠다는 김 대법원장의 취지를 공감하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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