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철학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식은 그의 제자 플라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남긴 기록에 의존한다. 당시에 글을 쓰는 일은 훈련받은 노예들의 ‘노동’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인쇄술이 없던 당시에 손으로 쓴 필사본의 원본성은 누구도 보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베껴 쓰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고의든 아니든 왜곡이 생겼을 테니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진짜로’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빠졌지만 소크라테스는 문자와 글을 믿지 않았다. 문자가 인간의 기억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도구라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는 인간이 글에 의존하게 될수록 인간의 뛰어난 능력인 기억력이 쇠퇴할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또 사람들이 글을 표피적으로만 읽고서 진실을 안다고 자만하게 됨으로써 젊은이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깊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고행을 회피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구어(口語)의 시대’에서 ‘문어(文語)의 시대’로 전환하는 과정 중에 살았던 소크라테스의 걱정과 불신은 ‘인쇄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갖는 고민과 두려움에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읽기의 본질은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존 러스킨의 저작 ‘참깨와 백합’을 번역하고 쓴 서문 ‘독서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책 읽기는 오롯이 혼자서 할 수 있는, 때로 스스로를 온전히 고독 속에 가두어 넣을수록 더 좋은 활동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갈 수도 없는 때와 장소로도 거침없이 날아가 내 경험을 확장하고, 내가 가진 지식과 생각을 다시 검토하고 때로는 그것을 뒤집을 수도 있다. 마크 에드먼드슨이 말하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풍요로운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소통’과 ‘비판적 사고’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핵심역량이다.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독서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당위론 앞에서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독서 문제를 더 깊이 있게 천착할 필요가 있다.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 매리언 울프는 디지털 경험에 노출되면서 건너뛰고 훑어보는 읽기 습관으로 인해 그동안 인간이 만들어 온 ‘깊게 읽는 뇌 회로’에 변형과 쇠퇴가 일어나고 비판적 사고와 공감능력, 성찰과 관조의 미덕이 실종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다시, 책으로’ 돌아오라는 간곡한 편지를 우리에게 보낸다.
부모가 편하게 식사하기 위해 아이 손에 아이패드를 쥐여주고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이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게임이나 동영상에 빠져 있는 풍경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디지털 시대의 전망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