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간 전세계 정부를 상대로 암호장비를 팔아온 스위스 회사가 사실 미 중앙정보국(CIA) 소유였으며 CIA는 서독 정보기관과 함께 손쉽게 정보를 빼내왔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가 폭로했다. 이 회사의 고객이었던 국가는 120개국이 넘으며 확인된 62개국에는 한국과 일본도 포함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WP는 11일(현지시간) 독일의 방송사 ZDF와 함께 기밀인 CIA 작전자료를 입수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2차 대전 이후 각국에 암호 장비를 제작·판매하는 영역에서 독보적 위상을 유지해온 스위스 회사 ‘크립토AG’는 사실 CIA가 당시 서독 정보기관 BND와의 긴밀한 협조하에 소유한 회사였다. 크립토AG는 2차 대전 당시 미군과 첫 계약을 맺은 이후 전 세계의 정부들과 계약을 맺고 암호 장비를 판매해왔으며 각국은 이 암호 장비를 통해 자국의 첩보요원 및 외교관, 군과의 연락을 유지해왔다. CIA와 BND는 미리 프로그램을 조작해둬 이 장비를 통해 오가는 각국의 기밀정보를 쉽게 해제, 취득했다.
크립토AG의 장비를 쓴 나라는 120여개국에 달했으며 확인된 곳만 62개국에 달했다. 이중 한국과 일본도 포함돼 있으며 인도·파키스탄·이란·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바티칸까지 고객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특히 냉전이 한창인 1981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사우디가 이 회사의 가장 큰 고객이었으며 이란과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이라크, 리비아, 요르단에 이어 한국이 뒤를 이었다고 WP는 전했다.
이 작전에는 애초 ‘유의어사전’이라는 뜻의 ‘Thesaurus’라는 암호명이 붙었다가 나중에 ‘루비콘’으로 변경됐다. WP는 CIA 역사상 “가장 대담한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CIA 작전사에도 “세기의 첩보 쿠데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주된 타깃이었던 구소련과 중국은 크립토AG의 장비를 절대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회사가 서방과 연계돼 있다고 의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초에 들어 BND는 발각의 위험이 너무 크다고 보고 작전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CIA는 독일이 갖고 있던 지분을 사들여 계속 작전을 이어가다가 2018년이 돼서야 물러섰다. CIA와 BND는 코멘트 요청을 거부했으나 문건의 진위를 반박하지도 않았다고 WP는 전했다.
/김기혁기자 coldmeta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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