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를 그린 거죠?”
“아뇨, 자화상이에요.”
다송이 엄마 연교(조여정)는 미술 과외선생으로 온 기정(박소담)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림을 내보이고, 기정은 천연덕스럽게 무의식적인 심리상태가 그림에 드러난 스키조프레니아존(schizophrenia zone·조현병 구역)에 대해 설파한다.
“그림을 번호로 부를게요. 1번과 5번을 섞어보시겠어요? 7번과 8번의 이미지를 합치면 어떨까요?”
디테일에 강한 봉준호 감독은 역시나 정교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사장(이선균)의 아들 다송이가 그린 ‘자화상’은 예상치 못한 복선이기에 더욱 중요했다. 결정적 연결고리가 될 그림 한 점을 뽑아내기 위해 봉 감독은 화가에게 무려 30점을 그리게 한 뒤 각 그림에서 원하는 부분들을 뽑아내 ‘자화상’을 탄생시켰다.
그림을 그린 주인공은 가수이자 랩퍼 출신의 후니훈(본명 정재훈)이다. 2015년부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지비지(Zibezi)라는 예명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던 그에게 연락을 해 온 봉 감독은 “침팬지 모습을 한 인간을 그리되 스키조프레니아존을 신경 써달라”는 당부와 “그 외엔 작가님께 다 맡기겠다”는 신뢰의 말을 건넸다.
후니훈은 ‘기생충’의 그림 작업에 5개월이나 매달렸고 그림을 30점 이상 그렸다. 꼭 한두 군데 씩 아쉬운 부분이 지적됐지만, 그는 감독의 디렉션을 경청하는 배우 같은 태도로 그림 제작에 매달렸다. 영화 흥행 이후 그는 봉 감독의 권유를 받아 자신의 화가 예명으로 개인전을 열고, ‘기생충’의 미국 개봉에 맞춰 지난해 10월에는 LA의 세 곳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국내외 호응에 힙입어 현재도 다수의 해외전시를 제안받아 추진 중이다.
‘영화 속 그림’은 짧지만 강렬하게, 작지만 섬세하게 영화 흐름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영화 ‘속물들’은 미술계를 배경으로 한다. 동료 화가의 작품을 베끼듯 모사하고는 ‘표절1’ 식의 제목을 붙여 ‘차용미술’이라 포장하는 작가 선우정(유다인)이 주인공이다. 창작자의 고통과 미술관 시스템의 어두운 민낯을 드러내는 이 영화의 말미에서 선우정이 고심 끝에 내놓은 핏빛 여성 누드화, ‘모작’은 주목받는 화가 유현경의 2017년작 ‘연수, 한국’이다. ‘남성화가와 여성모델’이라는 기존 화단의 공식을 뒤집고 젊은 여성 화가가 그리는 평범한 남성의 누드화로 이목을 끈 유 작가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스타 작가다.
그런가 하면 출연 배우가 직접 그린 그림이 영화의 화제성과 몰입도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사고로 아내를 잃은 상원(하정우)이 실종된 딸 이나를 찾아 나서는 내용의 영화 ‘클로젯’에서는 아이가 사라진 방에서 뒤늦게 상원이 찾아낸 오선지 노트 위의 검은 그림이 결정적 실마리가 된다. 빠르게 반복적으로 그은 선은 문이 열린 벽장과 그 앞에 선 놀란 눈의 소녀를 표현한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주연배우 하정우다. 하정우는 “제도적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나의 입장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며 그렸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캔버스 대작으로도 영화 속에 등장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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