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기세가 무섭다. 코로나19의 확진자수가 일시적으로 주춤해 사람들은 머지않아 마스크를 벗을 날이 오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바이러스 감염 확진자 숫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국민이 또다시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대구와 경북 지역의 주민은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화들짝 놀라고 다른 지역 국민도 지역 감염의 확산이 아닐까 싶어 더더욱 움츠러들게 된다. 이처럼 코로나19의 기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더더욱 무섭게 느껴진다.
코로나19의 발생과 전파 과정을 보면 세상에 처음 나타나 아직 치료제가 없는 신종 바이러스도 무섭지만 사람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가 유행하게 되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예방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때 마스크 쓰기와 30초 손 씻기 그리고 기침 예절은 바이러스의 위험으로부터 불안감을 덜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마스크가 돈이 된다는 점을 눈치챈 사람들은 폭리를 취할 방안을 찾았다. 마스크 재고가 있어도 시장에 제때 공급하지 않고 가격을 올려서 판매하느라 품귀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바이러스의 존재도 무섭지만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아줄 마스크의 부재는 무서움을 배가시켰다.
바이러스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상황은 이것만이 아니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됐다는 점이 알려지자 우한 시민과 후베이성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중국인의 입국 제한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나아가 음식점과 상점에 중국 사람을 거부한다는 글귀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이러스 감염의 두려움이 무차별적인 혐오를 낳은 것이다.
또 코로나19 감염자의 치료를 두고 내국민과 외국인의 차별 논란이 생겨났다. 왜 외국인 감염자를 본국으로 보내거나 유료로 치료하지 않고 우리가 비용을 부담하며 치료해야 하느냐를 두고 찬반이 팽팽하게 맞서기도 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확진자의 증상과 동선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 정보를 접하고서 왜 일찍 병원을 찾지 않았느냐, 어떻게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느냐며 공격적 언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슈퍼전파자로 간주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공격의 강도가 훨씬 거세진다.
코로나19 확진자를 치료한 의료진의 보고에서 알 수 있지만 확진자는 죄인이 아니다. 증상이 뚜렷하지 않거나 초기 증세는 감기와 비슷하니까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좀 더 조심했더라면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아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텐데’라며 책임을 따질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확진자가 겪는 고통만이 아니라 코로나19의 조기 종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위 사람에 대해 나를 감염시킬 수 있는 위험인물로 보기보다 함께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는 동료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북송의 장재는 매일 일상적으로 자신을 경계하느라 방에다 글씨를 써두었다. ‘서명(西銘)’으로 알려진 글을 보면 ‘모든 시민은 나의 형제이고 만물은 나의 짝이다(민오동포·民吾同胞, 물오여야·物吾與也)’라는 구절이 있다. 번역문이 길면 ‘인류는 동포, 만물은 벗’으로 압축할 수 있고 원문의 여덟 글자가 많으면 ‘민포물여(民胞物與)’라는 네 글자로 줄일 수 있다.
지금 괜히 코로나19의 감염을 일거에 종식시키는 어떤 존재를 찾거나 한꺼번에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을 요구할 계제가 아니다. 불가능에 희망을 걸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보다 불가능한 일에 초점을 두면 의혹이 늘어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점점 더 무서워진다. 대신 감염의 예방에 최대한으로 주의하고 설혹 감염된다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최선을 다해 치료하면 된다. 누구도 방치되지 않고 누구라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필요하다. 이 신뢰가 바로 민포물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주위에 사람이 있기에 무서운 것이 아니라 따뜻함을 느끼는 인간애를 공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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