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시절 ‘반미면 어떠냐’ 식의 직설적 도발과 달리 문재인 정부의 ‘반미’ 행태는 말과 행동이 달라 쉽게 포착하기 어렵다. 이를 간파한 미 정부가 과거 감정적 대응과 달리 냉정하게 “미군 철수는 없다”며 적극적인 한반도 개입·관여 정책으로 선회하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한미 갈등을 촉발시킬 ‘지뢰’는 사방에 널려 있다. 방위비 협상 미타결로 오는 4월 이후 주한미군 한인 근로자의 무급휴직이 거론되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문제도 숨은 복병이다. 24일 한미 국방장관 회담 결과가 주목된다. 여러 난관에도 미국이 ‘동맹 강화’로 기본방향을 잡는 것은 중국의 패권확장 견제라는 전략적 목표와 함께 북한의 무력위협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를 수호하려는 도덕적 열망 때문일 것이다.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미 민주당의 다수 주자가 북한 선제공격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점도 자유패권 독트린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미국 국민에게 있어 북한은 핵무장을 기도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폭정(tyranny)이기에 레짐 체인지(정권교체)만이 해결책이다. 국제사회의 보편적 대북 원칙의 반영이다. ‘가치가 혈연에 우선한다’는 명제가 현 집권세력의 ‘민족자주’ 왜곡 논리를 정면 돌파한다.
탈레반과의 아프간 평화협상 급진전 역시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아시아로 이동함을 보여준다. 최근 미 국방전략보고서(NDS)는 러시아보다 중국이 최대 도전국임을 적시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15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중국의 제국주의 경향을 강력 비판하고 북한을 도전국 2순위의 불량국가로 지목했다. 그리고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을 강조했다. 동아시아 신냉전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세계 171개국이 국방비 지출을 전년 대비 4%의 큰 폭으로 증대시켰다. 앞으로 있을 미중 대결에 대비하려는 것이리라.
북한 김정은이 지난해 말 ‘새로운 길’ 슬로건을 재확인하며 미국이 제재완화 등 전향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신형 전략무기 도발을 계속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첨단 정찰기 및 전략자산 배치 등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군사적 대응으로 일시 잠잠해졌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웅대한 작전’ 이름의 대남도발을 획책하고 있어 경계가 필요하다.
북한의 증강된 미사일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미 미사일 방어국장이 사드 발사대와 포대를 분리하고 이를 패트리엇 체계와 연동시키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그동안 환경평가라는 구실로 사드의 정식 배치를 미뤄온 문재인 정부가 대오각성해 우리 안보의 핵심인 한미 미사일방어 ‘상호운용(inter-operability)’ 체제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더 이상 근거 없는 ‘미사일 편입’ 거짓선동으로 국민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기를 바라지만 미국의 사드 개량 표명 시점에 느닷없이 지소미아 파기 가능성이 언론에 흘러나온 연유는 무엇인가. 반일 감정을 이용해 지소미아 파기를 사드 개량에 반대하는 지렛대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가.
한반도가 국제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한 구한말 이래 열강 사이에 낀 지정학적 한계가 21세기에도 숙명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는 강대국 간 힘의 균형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형적 사례로 한반도를 들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선의의 강대국과 동맹을 맺어 적대국에 대한 힘의 균형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안보의 첩경임을 가르쳐준다. 동맹은 이제 국제정치의 보편적 패턴이 됐고 유엔 헌장 역시 모든 나라가 동맹을 의미하는 집단방위를 통해 주권을 지킬 권리가 있음을 명시했다.
우리는 자체국방과 동맹이 결합해야 국가안보가 완성되는 구조다. 오늘날 교통·통신망의 획기적 발달로 지정학적 한계는 충분히 극복된다. 지리적으로 가깝다고 권위주의 독재체제인 중국과의 ‘한중 운명공동체’론에 맹목적으로 몰입함은 시대착오적 친중(親中)사대의 극치다. 부당한 사드·무역 압박을 당하고도 국민의 생명이 걸린 코로나 감염원 유입마저 방치하니 정상적인 정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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