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미학’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디자인은 포스터다. 제한된 면적에 그 내용을 담아내는 건 기본이요, 충분히 강렬하면서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을 갖춰야 한다. 이렇게 여러 제약사항을 극복한 디자인에만 짧게는 한 달, 길게는 2~3개월간 전시회의 ‘얼굴’이 될 자격이 주어진다. 그래서 처음 “(디자인 과정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는 답이 돌아왔을 때 겸손한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단순한 답변’은 일관적이었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의 김형진 대표는 “가능한 한 주관적인 해석을 배제하고 주어진 단어의 형태감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고 말했다. 전시명, 브랜드 이름처럼 말 그대로 글자 자체에 집중한다는 설명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역’이다. 심오할 필요도 없고, 심오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탄생한 ‘쉬운 디자인’은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광화문 일민미술관에 나붙은 세로 4층 길이의 ‘새일꾼’ 전시 포스터. 전시명인 새일꾼 세 글자를 세로로 배치하고 선거라는 주제에 맞춰 당선인에게 걸어주듯, 글자 중간에 꽃목걸이를 걸어준 게 전부다.
김형진의 ‘일차원적 접근 방식’은 이미 시장에서 검증됐다. 2006년 이경수·박활성과 함께 워크룸을 설립한 후 수많은 브랜드와 문화계에서 꾸준히 작업실을 찾았다. 매번 낯설어서다. 그는 “그래픽 언어를 포함한 시각언어를 은유적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광화문 일민미술관에 새일꾼 전시 포스터가 붙어있더라. 포스터 디자인 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새일꾼’ 포스터 작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릴 현수막의 비례였다. 세로 4층 길이의 길다란 캔버스 모양을 충분히 고려해야 했다. 부제도 있고 전시 날짜도 있지만 현수막에서는 ‘새일꾼’만 보이기를 원해 세로로 글자를 배치했다. 처음엔 글꼴을 정하는 걸로 끝내려던 작업 막바지에 양념이 첨가됐다. 선거라는 주제에 맞춘 양념. 선거하면 당선자들 목에 걸어주는 화환이 생각났다. 그렇게 글자 중간에 꽃 목걸이를 걸어줬다. 그 화환을 고르는 데 시간이 가장 많이 걸렸다. 선거의 승자를 부각시키는 시니컬한 톤의 포스터로 비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반응은 없었다.
-‘단순한 디자인’이란 게 정확히 뭔가.
△의미의 레이어를 단순화하는 거다. 책 표지작업이든 포스터든 공간 디자인이든 일관되게 접근한다. 책이면 책 제목, 전시면 전시명, 공간은 공간의 이름처럼 주어진 한 단어나 한 문장을 가능한 한 해석하지 않고 직역하려고 노력한다. 그래픽 언어로 직역한달까. 상징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하게 접근한다. 이렇게 일차적 방법으로 접근하면 낯설어한다. 사람들은 그래픽 언어를 포함한 시각언어를 은유적으로 보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광장이라는 단어가 주어졌을 때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광장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의미를 담아내는 그래픽을 지양한다. 광장이라는 한글 그 형태가 어떻게 이뤄지는가 내겐 더 중요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 ‘광장’의 표지엔 어떤 해석도 담겨있지 않다. 글자의 형태감만 살리는 데 주력했다. 광과 장의 ‘ㅇ’ 을 공유하는 형태로 만들었는데 10분도 안 걸렸다.
-서울역에서 열린 ‘호텔사회’전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 건가.
△똑같이 단순하다. ‘호텔사회’ 전시는 서울역에서 열렸다. 중요한 건 서울역이었고 그대로 포스터 디자인에 반영됐다. 중간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도 마찬가지. 호텔 하면 떠오르는 로비, 객실, 벨보이, 수영장 네 컷을 정해서 최지욱 작가에게 일러스트 작업을 맡겼다. 스테레오타입에 부합하는 디자인이다. 스테레오타입은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나는 그만큼 파워풀한 디자인이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설득하기 좋다는 이야기니까.
-작업시간이 그렇게 짧다니 놀랍다.
△실행에 옮기면서 반복작업을 해야 하는 책 본문교정을 빼고는 순식간에 결정하는 편이다. 본문작업은 참 지루하고 오래 걸린다. 교정을 열 차례 보기도 하는데 그런 건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외에는 빨리 끝난다. ‘숙성기간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와 유사한 과정이 필요하긴 하다. 최대한 생각 안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해야 되는 시점이 오면 대부분 1시간 안에 마무리한다. 거기에는 내 전공도 영향이 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아서 스케치를 못한다. 내 주변의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초기 스케치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작업을 한다. 그런데 나는 스케치가 안 되다 보니 컴퓨터에 바로 작업을 진행하는데, 문제는 폰트를 키웠다가 줄였다가 글자를 왼쪽에 배치했다가 오른쪽에 배치했다가 이런 식의 과정이 많이 반복됐다.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가는 거다. 그래서 훈련했다. 머릿속에서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컴퓨터를 켜서 그대로 재연하는 거다. 일종의 생존훈련이었다. 처음엔 머릿속에서 생각했을 때는 좋은데 옮기면 이상해지는 상황이 많았다. 머릿속 결과물과 실행의 결과물을 좁히는 노력이 필요했다.
-직관적인가.
△직관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직관이라는 말은 내 주관이 깊게 관여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철학에 간주관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에 가깝다는 게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주관과 주관이 만나는 교집합,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간주관을 추구한다.
-스스로 본인의 디자인 스타일을 정의한다면.
△확고한 스타일은 없다. 나는 스스로 절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 절충은 상황에서 온다. 상황이 스타일을 압도하는 편이다. 컬러나 글자의 형태나 그래픽의 양상들은 계속 바뀐다. 특정 스타일이 없다는 것 때문에 이런저런 작업을 하고 스펙트럼이 넓은 클라이언트들이 큰 부담 없이 연락을 주는 편인 것 같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에 나를 맞추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일을 엎는 경우도 빈번하다. 저 사람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끌려가면 좋은 작업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싶으면 거절한다. 일의 시작이건 중간이건 마무리작업이건. 최종 마무리 단계에서도 엎어봤다.
-타협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작업물에 강한 확신이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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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와 잘 싸워서 제시한 디자인을 유지하려고 노력 많이 한다. 내가 결정했던 궤도에서 이탈하면 길을 잘 잃는 타입이다. 그래서 설득을 잘 하는 편이다. ‘설득을 잘한다’의 전제조건은 그 전에 나를 믿을 수 있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걸 던져도 그게 충분히 합리적인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끔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관계를 만든다. ‘디자인은 협업’이라고들 하는데 동료 디자인과 클라이언트와의 작업이라고는 측면에서는 동의한다. 디자인의 시작지점은 클라이언트이니까. 하지만 그게 모든 수정 요구사항에 대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내가 제시한 최종 작업물은 분명 고객의 요구나 상황에 대해 주의 깊게 고민한 결과다. 그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다.
-패션 편집숍 브랜드 ‘에이랜드’하면 바로 물고기가 떠오른다. 패션과 물고기, 상상 못한 조합에서 받은 충격이 생생하다.
△2010년에 리뉴얼 작업이 들어왔는데 브랜드 로고에 나뭇가지가 붙어있었다. 필요 없다. 걷어냈다. 우연하게 에이랜드 이름을 가진 물고기를 찾았고 그렇게 리뉴얼 작업이 진행됐다. 사람들이 이게 뭔지 전혀 모르기는 하겠지만 패션편집숍과 물고기가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해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 물고기가 에이랜드다. 가로수길 매장 리뉴얼 작업 때 가림막에 물고기를 그려놨었다. 횟집 들어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들려서 클라이언트가 내심 불안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불안한 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생경한 조합으로 대중들에게 브랜드가 각인되는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글자 자체가 주는 이미지라는 게 뭔가.
△2018년에 작업한 회현동의 복합문화공간 ‘piknic(피크닉)’이 글자의 조형성에 집중한 작업이다. 일단 이름은 이미 picnic(피크닉)으로 정해진 상황이었다. 음료수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 ‘전시·공간·비즈니스 모델·커뮤니티를 아우르는 경험 플랫폼’이라는 회사의 비전과 말랑말랑한 느낌의 영문 picnic은 조화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picnic의 어감은 왕골 바구니에 돗자리가 필요한 느낌이 들었다. p도 그렇고 c도 그렇고 다 동글동글하니 세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영자가 필요했다. 그렇게 가운데 c를 k로 바꿨다. k가 더 세보이기도 하고 형태적으로도 날카로워서다. c를 k로 바꾼 것만으로 브랜딩 작업은 충분했다.
-스튜디오를 운영한지 15년차다. 그간 경험한 것 중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이었나.
△명시적인 위기는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과 한 몸으로 운영중인 출판사 워크룸프레스와 관련돼있다. 내부 구성원들의 의견이 조율되는 데 애를 먹었던 때다. 출판은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사양산업이고 그닥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다는 건 다 알고 있지 않나. 그래서 출판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는 걸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2011년으로 기억한다. ‘교보문고에 가면 있는 책을 만들자’. ‘다른 출판사처럼 그렇게 하자’는 너무 어려운 결정이었다. 사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책 만드는 전문가들이다. 만드는 것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수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출판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결심하기 힘든 이유가 뭐겠나. 현실적이든 개인적이든 수많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위기를 꼽자면 매해 두어번 씩 찾아온다. 그 때마다 가장 큰 위기다. 행정적으로 일을 컨트롤하기 힘든 시기가 온다. 일의 목록을 적어놓은 엑셀을 보면서 패닉에 빠지는, 리스트를 보고 있다 보면 ‘답’이 안 나오는 순간이 매년 찾아온다.
-“누군가 이 책을 지하철 안에서 읽는다고 했을 때, 어떤 느낌일까를 상상하며 책을 만들었다”는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책 ‘제안들’을 작업하면서 생각했던 내용이다. 가장 오래 작업한 책표지다.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떠오르는 게 없어서 위로가 될만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봤다. 남자 주인공인 에단 호크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너무 멋있는 거다. 내가 만든 책이 필름 속 에단 호크가 들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모양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작업했다. 사실 내가 작업하는 책 본문의 행간이 좁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이것도 비슷한 논리인데 에단호크가 행간이 너무 넓은 책을 읽고 있으면 덜 멋있지 않나. 나는 일반적인 한글책의 행간이 지나치게 넓은 편이라고 보기도 하고.
-책은 표지장사라는 말에 동의하나.
△동의한다. 디자인과 판매 사이의 함수가 성립할 수는 있는데 단순한 상관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해 베스트셀러 50권을 뽑는다고 하면 표지 덕에 잘 팔린 책이 1~2권 정도는 있겠지만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표지는 ‘이 표지가 아니었다고 하면 지나쳤을 사람들 몇 명 정도를 유혹할 수 있는 정도’다.
-잘 덜어내는 비결이 있다면.
△덜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고객들 중에도 흰 바탕을 못 참고 어슴프레하게 배경을 깔아달라거나 뭘 넣어달라거나 그런 요청을 하는 분들이 예전엔 꽤 있었다. 불안해서다. 자꾸 뭔가를 덧붙이려는 건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얘기하려는지 잘 모르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문장이나 그래픽이나 빛을 산란시켜서 어디서 빛이 나오는지 모르게 만드는 것. 자신감이 있으면 뭐든 뺄 수 있다.
-스튜디오 운영 초기와 비교하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소규모 스튜디오가 막 시작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땅따먹기하는 듯한 그런 재미가 있었다. 당시 워크룸이 내놓는 그래픽은 한국에서는 나름 새로운 면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좀 더 모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의 워크룸은 모험적인 사람들이 찾아오는 빈도가 줄었다. 안전한 디자인을 원하는 사람들이 택하는 스튜디오가 됐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자면 낯선 그래픽일 수 있지만 자체적으로 평가하자면 ‘조금 새로운 안전한 그래픽’이 됐다. 안전한 스튜디오가 된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문화계 그리고 디자인 업계에서 봤을 때 ‘불편한 구석’이랄까, 껄끄러운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보다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드는 자괴감이랄까. 물론 워크룸이 어떤 곳이고 무슨 일을 해왔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은 분명 있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사진제공=워크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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