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8년 7월. 영국 스코틀랜드 근처 북해 유전에서 석유시추선이 폭발했다. 사고로 168명이 목숨을 잃었다. 앤디 모칸은 지옥 같은 그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다. 어떻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까. 잠결에 들린 요란한 폭발음에 갑판으로 뛰쳐나온 모칸이 몸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갑판 곳곳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바다는 배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이미 불바다였다. 갑판에서 수면까지는 50m가 넘는 높이였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바다로 뛰어내린다고 해도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컸다. 잠시 망설이던 모칸은 불꽃이 일렁이는 차가운 북해로 몸을 던졌다.
모칸의 사례를 인용한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국가의 위기관리 리더십과 정책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찰나의 순간, 모칸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내린 결단 덕분에 하나뿐인 목숨을 건졌다. 배에 남아 있던 나머지 168명은 왜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국가도 조직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릴 수 있다. 제대로 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코로나19 사태는 단순히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 감염이 아니다. 한국 사회, 특히 한국 경제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이미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 바이러스 공포에 국민의 일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최근 한 조사에서 국민 60%가 “일상의 절반이 멈췄다”고 답했을 정도다. 분명 과거 우리가 경험했던 바이러스 사태와는 상황이 다르다. 사실상 국가 비상사태다. 이쯤 되면 전시(戰時) 상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정부의 대응은 여러모로 아쉽기만 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비상한 경제 시국에 대한 처방도 특단으로 내야 한다. 정책적 상상력에 어떤 제한도 두지 말고 과감하게 결단하고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정책적 상상력은 고사하고 기존 틀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대응은 빠르고 정확해야 한다. 환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도려내는 것은 실력이다. 손발도 맞아야 한다. 마스크 공급도 제대로 못 하는 정부라니.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사실상 배급제인 마스크 5부제까지 시행하게 됐다.
문제는 코로나19 사태 이후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겪고 난 뒤 사람들의 행동과 대응양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올해 1·4분기 경기는 역대 최악일 것이다. 급하게 추가경정예산까지 편성하며 불을 끄려고 하지만 아직 현장에는 돈이 내려가지도 않았다. 연초 반도체 경기 상승을 계기로 긍정론으로 돌아서는 듯했던 해외 투자은행(IB)들이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팬데믹’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미 팬데믹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까지는 국내 방역과 내수침체 문제였다면 이제부터는 외부충격에 선제 대응해야 할 때다.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 수출 부진 등 우려했던 C스톰의 여파가 본격화될 것이다. 이제 정부의 진짜 실력이 드러날 상황이다. 불타는 갑판이 눈앞에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이고 과감한 정책적 선택이 필요하다. 추경으로 돈 몇 푼 더 쥐여주고 마스크 5부제로 국민을 줄 세우는 것이 창의적인 정책은 아닐 것이다. 속전속결은 기본이다. 우물쭈물 대다가는 한 방에 훅 간다. 정부가 개교를 사상 처음으로 3주나 연기하면서 밝힌 골든타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김정곤 탐사기획팀장 mckid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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