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의 두 번째 황제 하인리히 6세.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잘 다져놓은 기반 덕분에 무탈하게 황권을 계승한 그는 재위 초기 다소 어려움을 겪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공격적인 영토 확장에 몰입했다. 하늘의 운마저 그의 편이었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전역, 북부 이탈리아 일부 영토까지 통치하게 되면서 유럽에서 소위 가장 ‘잘 나가는’ 군주가 됐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하인리히 6세를 가로막고 선 건 뜻밖의 질병이었다. 그는 시칠리아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 메시나에 머물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급사했다. 불과 31세였다. 말라리아는 아프리카 풍토병이었지만 당시 기온이 상승하면 지중해를 넘어 영국과 라인 강 유역까지 기승을 부리곤 했다. 워낙 황당한 죽음이었기에 세간에서는 태후 콘스탄체가 하인리히 6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독일의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도날트 D. 게르슈테는 하인리히 6세가 말라리아로 급사하지 않았다면 “독일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지 모른다”고 말한다. 하인리히 6세가 구상했던 중앙 집권화가 실현되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여러 군소국가로 쪼개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그렇다면 독일은 물론 유럽 역사 전체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쓰였을지 모를 일이라고.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역사에 대한 상상은 독서가 주는 큰 재미 중 하나다.
■수에즈 위기 뒤엔 英 총리의 담낭 질환
신간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역사 속 주요 인물을 덮친 질병이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바꿨는지, 전염병의 대유행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낸 책이다. 저자인 게르슈테는 과거 질병이 사회 경제에 미친 영향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동시에 질병이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했던 정치가들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를 들여다봤다. 질병은 하인리히 6세 뿐 아니라 역사 속 여러 왕과 대통령, 총리, 독재자들의 신체를 갉아먹었으며, 그로 인해 정치와 외교가 불안하게 흘러가곤 했다.
관련기사
미국에서는 로런스 워싱턴과 조지 워싱턴 형제의 운명을 질병이 바꿔 놓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에게 형 로런스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군복을 입은 모습은 근사했던 로런스는 영국 페어팩스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다. 하지만 로런스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조지 워싱턴이 형 대신 유산을 물려받으면서 군사적, 사회적, 정치적 신분에 필요한 재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전한다.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를 초래했던 영국 앤서니 이든 총리의 오판은 담낭 질환에서 기인한 것으로 설명된다. 담석수술 실패로 인한 후유증과 그에 따른 약물중독이 1956년 중대한 결정에서의 오판으로 이어지면서 중동에서의 위기를 초래하고 영국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재임 시절 엘리제 궁은 ‘거짓 공간’으로 평가했다. ‘강대국’이라는 수식어를 지키기 위해 최고 권력자가 암 환자라는 사실을 국민들과 국제사회에 숨겼다는 이유에서다.
■매독 확산 후 ‘금욕’ 강조 사회로
책은 커다란 사회 변화를 초래한 매독, 페스트, 천연두, 결핵, 독감 등도 함께 소개한다.
15세기 후반 나폴리에 입성한 프랑스 군은 나폴리군이 프랑스 진영 쪽으로 내쫓은 여인들을 반겼다. 하지만 이후 병사들은 온몸이 고름으로 덮이거나 급사하는 끔찍한 질병에 시달렸고, 병사 수가 급감해 결국 프랑스군은 퇴각했다. 프랑스군을 괴롭힌 질병은 매독이다. 이후 ‘악마의 저주’로 불린 매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가면서 유럽 사회에서는 금욕 분위기가 조성됐다.
페스트는 14세기 영국 인구의 40~50%를 사망케 했을 정도로 무서운 질병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도 페스트로 인해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노동자들의 몸값은 높아졌고, 식량 부족도 없어졌다.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결핵은 젊은이들의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가나 화가, 음악가 등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결핵은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됐다. 예술가들이 마지막 혼을 불태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만7,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