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한 후배에게 인사를 건네며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팔을 두드리던 차였다. 후배의 농담 섞인 질타에 속으로 ‘아차’ 싶어 황급히 손을 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리며 모두가 끝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힌 지금, 매일 출근하는 사무실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동료의 잔기침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이때, 늘 하던 가벼운 접촉은 비매너이자 위험인자가 된다.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던 ‘거리두기’는 어느덧 당연한 일상이 됐다. 모임이나 약속은 사라진 지 오래고 누군가와 식사할 때는 반찬을 각자 덜어 먹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마스크 착용의 불편함 때문인지 비말에 대한 염려 때문인지 동료들과의 대화도 준 것 같다. 감염증이 고령자에게 치명적이라는 경고가 잇따르면서 나이 드신 부모님을 만나기도 부담스러워졌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커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 지인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자신과 마주친 노부부가 말없이 장갑에 고글까지 끼더라며 당황스러워했다.
거리두기는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지역이나 국가 차원에서는 유례없는 교류 단절이 진행되고 있다. 코로나19의 진원지로 알려진 중국 우한은 일찌감치 봉쇄됐고 미국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인에 대해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에 이어 스페인이 전국 봉쇄령을 내렸다. 한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국가는 16일 현재 138개국에 달했다.
바이러스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감염 차단을 위해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외국인에 대해 빗장을 거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단호한 경계와 부단한 노력이 이어진다면 전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19 위기도 언젠가 극복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코로나19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일상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장담하기는 어렵다. 영국에서는 15세기에 헨리 6세가 흑사병 차단을 위해 볼키스를 금지한 것을 계기로 악수가 인사법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악수가 눈인사로 대체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거듭되는 감염병에 대응해 아예 사람들 간의 비접촉 문화가 일상에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얘기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비대면(언택트)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 감염증을 비롯한 여러 불안요인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후유증이 따를 수 있다. 물리적 거리감이 낳게 될 심리적인 장벽 말이다. 영국의 저자 팀 마셜은 최근 낸 책 ‘장벽의 시대’에서 “물리적인 분리는 정신적인 분리에 반영된다”고 했다. 거리두기는 안전을 보장해주지만 서로가 거리를 두는 사회는 이전보다는 분명 더 차갑고 고립된 모습일 수밖에 없다.
어떤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가장 추악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는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 아시아인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코로나19와 관련한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폭행 장면들이 떠돌아다닌다. 코로나19를 핑계로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고개를 들고 있는 양상이다. 이들 나라만 탓할 일도 아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특정 국가와 지역, 집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과 혐오의 감정이 불거지지 않았나.
국가 차원의 입국금지나 지역 간 이동제한 조치는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해제될 것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경계심, 무엇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표출된 특정 지역이나 국가·인종에 대한 차별과 배제, 혐오가 이들 조치와 함께 사라질지는 의문이다. 코로나19를 극복해낸다고 해도 더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는다면 그 의미는 퇴색되고 말 것이다. 지금 물리적인 거리두기에 기울이는 노력 못지않게 마음의 장벽을 거둬내기 위한 저마다의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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