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파산하면서 촉발된 금융위기 불길이 미 금융권 전체로 번지자 벤 버냉키 당시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제로금리와 양적완화(QE) 두 가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는 2008년 말 국채 3,000억달러어치와 주택저당증권(MBS) 1조2,500억달러어치 매입을 시작으로 무제한 돈 풀기에 나섰다.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린다는 의미의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연준이 15일(현지시간) 내놓은 금리 1%포인트 인하와 7,000억달러(약 854조5,600억원) 규모의 채권 매입 카드는 연준이 금융위기 때로 돌아갔음을 뚜렷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꾸로 지금 상황이 금융위기 때와 같거나 더 나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기다렸다는 듯 “정말 좋은 소식”이라며 “아주 행복하다”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 연준은 제로금리와 함께 국채 5,000억달러어치와 MBS 2,000억달러어치를 사들이기로 했다. 2008년과 2010년, 2012년 세 차례 QE에 이은 본격적인 QE 시즌4다. 앞서 연준은 만기 제한 없이 600억달러어치의 국채를 매입해 사실상 QE의 물꼬를 텄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날 “국채와 MBS 시장의 유동성 부족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매입 배경을 설명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타격이 예상되는 가계와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대책들도 나왔다. 연준은 은행의 지급준비율을 0%로 인하하고 은행의 긴급대출 금리도 0.25%로 1.50%포인트 낮췄다. 지급준비율을 낮추면 은행이 연준에 의무적으로 맡겨야 하는 자금이 줄어 대출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은행의 자본과 유동성 규제도 사실상 완화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은행지주회사들은 자본을 대규모로 쌓고 유동성을 확보해야 하는 규제를 받고 있다. 현재 가장 건전한 회사는 보통주 1조3,000억달러어치와 2조9,000억달러의 유동자산을 갖고 있다. 연준은 “은행들이 자본과 유동성 여력을 활용해 코로나19에 영향을 받는 가계와 기업에 대출을 해주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표현은 독려지만 대출을 대폭 확대하라는 압박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주요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들도 이번 사태는 금융위기가 아니라며 적극 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추가 대책을 내놓지 않겠느냐고 보고 있다. 1차적으로는 연준이 기업어음(CP)이나 회사채, 또는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한계상황에 몰린 기업들을 지원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많다. 월가에서는 이날 주가지수 선물이 급락한 것은 이들 항목에 대한 매입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연장선상에서 재무부 주도로 금융위기 때 사용됐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이 재도입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코로나19에 따른 충격이 항공과 숙박·식당을 넘어 스포츠와 전시·카지노·미디어 등 전 산업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당시 씨티와 JP모건 같은 주요 금융사와 제너럴모터스(GM) 같은 자동차 업체가 TARP를 통해 지원을 받았다. 미 경제방송 CNBC는 월가의 한 관계자를 인용해 “TARP는 은행의 부담을 덜고 기업과 경제의 다른 부분에 자금을 제공했다”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며 TRAP 도입을 촉구했다.
다만 파월 의장은 현재로서는 향후 정책 방향을 알려주는 포워드가이던스와 자산매입으로만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마이너스 금리는 미국 경제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자산매입은 더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런 전통적 통화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이에 상응하는 재정정책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파월 의장은 이날 “연준은 특별한 계층을 직접 지원할 수 있는 재정정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재정정책을 요구한 셈이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도 “우리는 9이닝 가운데 2이닝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해 추가 지원 가능성을 거듭 시사했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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