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참전 군인들에게 위로 메시지를 보냈다. 여왕은 “당신들의 용기는 진정하고 지속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면서 “당신들의 행동이 전쟁을 수행하거나 평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최고의 전통 속에 있기를 기원한다”고 격려했다. 당시 여왕의 메시지를 접하고 과거 엘리자베스 1세의 명연설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와의 일전을 앞두고 “나는 연약한 여자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영국 왕의 심장과 위장을 갖고 있다”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훗날 테리사 메이 전 총리 등 여성 정치인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 서거한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올해 93세인 여왕은 재위 68주년을 맞아 현존 최장수 군주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여왕은 나라가 위기와 갈등에 휩쓸릴 때마다 국민을 하나로 모으고 아픈 상처를 위로하는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는 “올해는 여러 이유로 침울하다”며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황”이라고 국민을 달랬다. 2011년 아일랜드 방문 때 고통받은 이들을 달래고 화해의 손길을 건넨 것도 여왕의 몫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대국민 연설에서 왕실 특유의 딱딱한 언어를 줄이는 대신 젊은이나 하층민의 발음을 받아들여 대중 친화적인 여왕으로 변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오랜 세월 영국인의 사랑을 받은 것도 공동체 연대의식과 자발적 동의를 중시하면서 보여준 신뢰 덕택이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한 가운데 엘리자베스 2세가 5일 특별 대국민 연설을 통해 국민들의 절제와 단결을 호소했다. 여왕은 이날 연설에서 “우리가 확고하게 단결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후세가 우리를 매우 강인한 사람들로 기억하고 응전 방식에 자부심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역설했다. 정치권에서는 절제된 언어로 국민에게 용기를 안겨줬다며 호평을 쏟아냈다. 난세일수록 신뢰 속에서 민심을 어루만지고 하나로 모으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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