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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권력' 취한 서태후의 궁궐, 中왕조 붕괴 불렀다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3> '황제의 정원' 이화원

자금성과 베이징 양대 궁전 '이화원'

금나라때 산기슭에 지은 행궁이 모태

규모 커졌지만 아편전쟁 등으로 불타

황제 좌지우지한 서태후가 재건공사

비용 대려 신식함대 운영비까지 유용

결국 청일전쟁 패배로 왕조 붕괴 불씨

이화원의 건물들이 파란 호수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다. 오른쪽 만수산 중턱에 우뚝 서있는 것이 불향각이다. 왼쪽 멀리 백탑이 있는 곳이 곤명호 물의 원천인 옥천산이다. 더 너머로 베이징을 둘러싸고 있는 서산이 보인다.




중국 베이징의 이화원(이허위안)은 늘 활기가 넘친다. 특히 요즘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속박에서 벗어난 베이징 시민들로 가득하다. 베이징의 양대 궁전 중 하나인 자금성(쯔진청)이 방역을 이유로 여전히 폐쇄 중인 가운데 라오바이싱(老百姓·서민)들은 이화원으로 몰리고 있다. 이화원에서는 코로나19 창궐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 미세먼지 없는 푸른 하늘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함께 상춘객을 맞고 있다.

이화원은 과거 중국 황제들의 개인 정원이다. 곤명호 호숫가에 서보면 왜 역대 황제들이 이화원을 아꼈는지 알 수 있다. 베이징이라는 도시는 산악지대와 바다 사이의 평원에 건설됐는데 이화원은 이 평원이 산과 만나는 가장자리에 터를 잡았다. 이 때문에 베이징에서는 특이하게 산과 호수를 함께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이화원의 내력을 알면 풍경에 취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중국 전통 왕조의 마지막 순간이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황제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조종한 서태후(1835~1908)가 황제급의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며 자금성에 버금가게 만든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가 자신과 국가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도 하는데, 오히려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예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이화원의 면적은 2.97㎢ 로, 곤명호라는 이름의 호수가 4분의3을 차지한다. 나머지 4분의1 공간에 높이 59m(해발 109m)의 아담한 만수산을 중심으로 수십 채의 건물이 서 있다. 만수산 중턱에 3층 목탑인 불향각이 있고 그 앞에 배운전이라는 전각이 있어 축을 형성한다.

곤명호 내 남호도라는 섬에는 함허당이 있다. 불향각에 서서 보면 왼쪽으로 베이징 시내가, 오른쪽으로는 중국인들이 보통 서산이라고 부르는 태행산 끝자락이 보인다.

이화원 지역이 ‘황제의 정원’으로 꾸며진 것은 베이징을 처음 수도로 정한 여진족의 금나라 때부터다. 원래는 옹산이라는 언덕과 인근 옥천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고인 서호라는 호수로 이뤄져 있었다. 1153년 금나라 해릉양왕이 옹산 산기슭에 행궁을 지으면서 이화원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화원 내 서태후의 침소였던 ‘낙수당’


시대가 지나면서 정원은 점점 커졌다. 몽골족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이 서호를 준설하면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 높였다. 한족의 명나라가 들어선 후 정덕제는 이곳에 호산원이라는 행궁을 세우고 옹산이라는 이름은 금산으로 바꿨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결정적으로 이화원의 규모를 확대했다. 건륭제는 1764년 이곳을 청의원이라는 ‘황제의 정원’으로 꾸미고 옹산(금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로 개칭했다. 다만 이때까지도 청의원은 황제의 정원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원명원이 핵심이었고 청의원은 상대적으로 소박했다.



이런 정황은 청나라 말기 격변하는 정세가 뒤바꾼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공했고 이때 원명원·이화원을 비롯해 당시 ‘3산5원’으로 불렸던 황제의 정원은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대규모 복구공사가 필요했는데 당시 실권자인 서태후는 이화원을 점찍었다. 누가 봐도 이화원의 위치가 좋았던 것이다. 최종 공정이 서태후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지금의 이화원은 베이징의 다른 궁궐 유적과는 달리 여성적인 면이 강하다.

다만 청나라 말기 국력이 쇠퇴 중이어서 이화원의 복구비용을 대기가 쉽지 않았다. 이화원의 재건공사는 국력을 모두 쏟아 1884년부터 1895년까지 11년 동안 진행됐다. 자금난에 시달렸던 청 조정은 당시 건설 중이던 신식 해군함대 ‘북양함대’의 운영비도 유용했다고 한다. 이는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이어져 왕조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이화원의 최전성기는 1895년 완공 직후였을 듯하다. 이화원이라는 이름도 당시 붙여진다. 하지만 운은 계속 나빴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미국·영국·일본 등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또 침공했는데 그때 이화원도 다시 불탄다. 서태후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국가 재정이 거덜 나는 가운데서도 1902년 다시 이화원을 재건한다. 바로 지금의 모습이다.

꼭두각시 황제들을 앞에 세우고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서태후는 실제 대부분의 시간을 이화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사실상 황제인 서태후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이화원에도 자금성처럼 정전과 침궁이 있다. 집무를 보던 정전이 인수전이고 일상생활하던 침소는 낙수당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수전이 건륭제 시기 처음 지어질 때 이름은 근정전이었다. 우리나라 경복궁의 그 근정전과 이름이 같다. 비슷한 심정으로 이 건물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후 서태후 때 재건하면서 이름을 인수전으로 바꿨다.

곤명호 호숫가에 앉아 호수 건너 만수산의 건물들과 더 멀리 서산을 바라보면 국가의 운명을 느끼게 된다. 서태후 이전의 중국 황제들이 이화원을 소박하게 둔 데는 이유가 있다. 이화원이 너무나 낭만적인 모습이어서 황제들이 국가를 만들고 이를 긴장 속에 유지하게 하는 자극은 주지 못했다. 그런 악착과 거리가 멀었던 서태후에 의해 최고의 정원으로 거듭났지만 이는 중국 전통 왕조의 종말을 앞당기게 했을 뿐이다.

/베이징(글·사진)=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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