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여당의 전례 없는 압승으로 끝났다. 사상 초유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국민은 견제보다 안정을 택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전국 규모 선거에서 네 번 연속 승리한 최초의 정당이 됐다.
미국의 키이 교수는 “정당 간에 입장을 달리하는 중요한 쟁점의 등장으로 이념적인 분극화가 초래되고 이에 따라 중요 정당의 지지 기반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할 때 정당 재편성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선거를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라고 설명했다. 지난 1932년 미국 대선에서 현직인 공화당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게 대항한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큰 정부론’을 제시했다. 결국 루스벨트의 승리로 뉴딜 민주당 시대가 열렸고 민주당 우위의 정당 체제는 1960년대까지 지속됐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민주당의 네 번 연속 승리는 기존의 ‘보수ㆍ진보 양당 체제’가 무너지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진보 좌파 정당 체제’가 구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은 중대 선거의 성격을 띤다.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보수 산업화 세력이 진보 민주화 세력으로 교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거 결과는 여권의 압승이지만 선거 과정 측면에서 평가해보면 여야 모두가 패배한 최악의 선거였다. 첫째, 반칙과 꼼수가 난무했고 도덕과 윤리가 실종됐다. 범여권 소수정당이 그동안의 오랜 관례를 깨고 ‘게임의 룰’인 선거법을 제1야당을 배제한 채 밀어붙였다. 표의 비례성을 높이고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거대 양당 체제를 종식시킨다는 본래의 취지는 사라졌다. 거대정당들이 ‘떴다방’ 수준의 비례 전담 위성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오히려 양당 정치가 강화되는 역설이 나타났다. 선거 국고 보조금을 받아내고 비례대표 선거 투표용지에서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거대정당들이 위성정당에 ‘의원 꿔주기’를 하고, 위성정당들은 원칙과 기준 없이 비례대표 후보를 선정했다. 미래한국당에서는 ‘한선교의 난’으로 비례대표 후보가 전면 교체됐고 민주당의 서자 비례정당인 열린민주당의 경우 공문서위조로 검찰에 기소된 사람, 부동산 투기로 청와대에서 물러난 사람, 음주운전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버젓이 비례대표 상위에 포진했다.
둘째, 공약은 사라지고 막말과 망언이 판을 쳤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번 총선은 후보와 공약 등 기존 선거의 관심사들이 모두 묻혀버린 ‘깜깜이 선거’였다. 후보자와 유권자 간의 접촉이 최대한 억제되는 ‘비대면 선거’ 양상을 띠었다. 지난 3년간 현 정부가 핵심적으로 추진했던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적폐 청산,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그리고 조국 사태 이후 불거진 현 정권의 도덕성 등에 대한 여야 공방은 코로나19에 묻혔다. 그 대신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한 민주당 후보의 여성 비하와 성희롱 논란, 미래통합당 후보들의 ‘3040 세대 비하 발언’ ‘세월호 유가족 폄훼 발언’ 등의 막말로 정책선거가 실종됐다.
셋째, 거대정당이나 군소정당 할 것 없이 국가 재정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역대 최대 돈 선거에 올인했다. 민주당이 코로나19 사태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소득 하위 70% 가구에 100만원(4인 가구 기준)을 지급하기로 하자 통합당은 ‘전 국민 50만원 지급’으로 대응했다. 수십 조원이 소요되는 막대한 재정의 확보 방안, 정책 효과, 지급 기준 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연일 ‘돈 퍼주기’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정치가 포퓰리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대가는 혹독하다. 공룡 정당의 등장과 최약체 야당의 존재로 총선 이후 정치 양극화는 더욱 심화할 것 같다. 승리한 집권세력이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무시하고 법에 규정된(또는 금지되지 않은) 권한을 최대한 휘두르면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고 민주정치는 대혼돈에 빠져들 수도 있다.
여하튼 선거 과정이 잘못됐기 때문에 21대 국회는 실패 위험인자를 안고 출범하게 된다. 단언하건대 국정 안정은 여당의 절대 의석수에 의해 담보되지 않는다. 거대 여당은 경제위기 타개를 위한 빠른 정책 전환과 부활한 영호남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협치와 공존의 정치에 앞장서야 한다. 야당도 이번 총선 민심에서 확인된 ‘크게 변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1대 국회도 ‘역대 최악의 국회’로 추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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