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끼와 객석의 기(氣) 만나 폭발하는 에너지, 그게 정말 굉장하거든.” 빈 무대를 응시하는 노배우의 눈이 설렘 가득한 소녀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관객과 호흡하던 이야기를 꺼낼 때면 마치 그 시간에 들어가 있는 듯 짜릿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극이 나를 숨 쉬고 살게 해준다”는 배우 박정자에게 불 꺼진 무대와 텅 빈 객석은 아픔이고 또 아픔이다. 그러나 이내 “곧 툭툭 털고 일어나 관객을 만날 그 날이 선물처럼 다가올 것”이라며 상처를 보듬는 연극계의 대모를 그가 지난달 이사장으로 취임한 서울 관악문화재단에서 만났다.
한창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릴 시기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지역 문화단체의 활동은 모두 중단된 상황이다. 관악문화재단도 3~4월 마련한 음악극, 뮤지컬 등 기획공연을 모두 취소 또는 연기한 상태다. 발길 끊긴 공연장을 둘러보던 박정자는 “60여 년간 쉽게 연극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번에는 전 세계가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모양새”라며 혀를 내둘렀다. 당장 멈춰선 무대도 안타깝지만, 더 큰 상처는 따로 있다. ‘이런 때 공연은 왜 하느냐’, ‘이 상황에 무슨 예술이냐’는 일각의 비난이다. 코로나19를 이유로 무대에 공연을 올리는 것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아직도 어려워지면 문화비부터 줄이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문화라는 게 일상에서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 그런 시선이 참 안타깝죠.”
그의 이야기는 최근 화제가 된 모니카 그뤼터스 독일 문화부장관의 발언으로 옮겨갔다. 그뤼터스 장관은 코로나 19 문화예술 분야 지원 계획을 발표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문화는 좋은 시절에만 허용되는 사치품이 아니다. 일정 기간 그것(문화)을 포기해야 하는 이 시점에 우리가 문화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다.’ 침묵 속에 이 발언을 곱씹던 박정자는 되물었다. “인간 삶에 문화 아닌 것이 있을까요.” 그는 “‘그냥 주어진 일상’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문화에 무관심해지는 것 같다”며 “저런(그뤼터스 장관의) 말을 우린 들을 수 없어 아쉽다. 좋은 것은 따라 배웠으면 한다”고 씁쓸해했다.
12년간 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열악한 공연계의 현실을 보고 들어온 그는 관련 기관에 대한 주문도 잊지 않았다. “정부 지원이 없는 연극인복지재단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아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예술인복지재단이 이럴 때야말로 목소리를 더 내고 행동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문체부는 최근 코로나19로 피해 본 공연예술 단체·개인을 위해 예술인복지재단·예술경영지원센터 등을 통해 저금리 대출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이미 빚이 있는 상황에서 대출을 받으라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못 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박정자는 지난해 출범한 관악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올 3월 임명됐다. 일상 속의 문화를 더 살리고 알리는 역할은 본인이 평생 해 온 일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한 달 지난 소감을 묻자 배우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이사장’이라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일 뿐 직함은 큰 의미는 없다”며 “예술을 한다고 60년 가까이 한 분야에 있었으니 조금은 덜 경직된 시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웃어 보였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거창한 비전이 아니라, 작아도 실행 가능한 노력이다. 관악구의 대표 행사 ‘강감찬 축제’를 문화 브랜드로 강화하고, 관악중앙도서관을 비롯해 12곳에 달하는 구내 도서관을 특화해 운영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깊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영화 ‘기생충’ 예고편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한 박정자는 코로나19로 지친 사람들을 응원하기 위한 시 낭송 릴레이도 펼칠 계획이다.
60여 년 연극 인생. 무대 위아래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천생 배우는 그래서 ‘곧 다가올 희망’을 이야기한다. “모두의 노력 덕에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있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멈춰 섰던 공연도, 사람들의 일상도 새싹 돋듯 움틀 것입니다. 힘든 시간을 견뎌낸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세요.”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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