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4월22일, 오스만튀르크의 8만 대군이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선지 19일째 여명. 주민들이 경악과 공포에 빠졌다. 동이 트며 오스만 함대가 ‘금각만(Golden Horn)’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성벽 북쪽의 금각만은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한 800m 길이의 거대한 쇠사슬이 설치된 지역. 보스포루스 해협과 흑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오스만 해군은 쇠사슬을 끊고 금각만 진입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해안포의 포격에 막혔다. 방어군은 급히 쇠사슬을 확인했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어떻게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동이 튼 뒤 갈라타 언덕 위에 나무 레일이 보였다.
해발고도 70m인 갈라타 언덕에 나무판자를 깔고 소와 인력을 동원해 76척의 오스만 함정이 밤새 산을 넘어온 것이다. 금각만 방어선 붕괴는 콘스탄티노플 전투의 전환점이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지원군을 포함해도 고작 7,000여명인 병력, 시민을 전부 합해도 5만명으로 오스만의 군대보다 적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비교적 여유 있게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바다로 돌출된 삼각형 형태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은 7.5㎞의 동쪽 성벽과 5.5㎞인 서쪽 성벽, 8㎞인 북쪽 성벽으로 구성됐으나 동쪽과 서쪽만 막았다. 북쪽은 금각만 쇠사슬에 막혀 있었던 덕이다.
금각만이 뚫린 뒤, 방어군은 병력을 북쪽 성벽에도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병력이 부족하고 전선이 8㎞나 늘어난 뒤에도 콘스탄티노플은 34일을 더 버텼지만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금각만은 방어자 입장에서는 희망의 불씨였다. 규모가 작았어도 금각만을 통해 성 안으로 유입되던 서유럽 각국의 지원물자가 완전히 끊긴 뒤 콘스탄티노플은 서서히 말라 죽었다. 적은 병력의 피로가 누적되고 물자가 끊기니 전투 의지도 꺾일 수밖에. 오스만 군대는 갈라타 언덕에 나무 길을 내는 야간공사를 감추기 위해 거포를 집중 발사해 방어 측의 감시에서 벗어났다.
바이킹이나 베네치아가 배를 언덕 위로 옮긴 적은 있었으나 대규모 함대가 산을 넘은 것은 사상 처음. 오스만튀르크의 젊은 술탄(21세) 메흐메드 2세의 역발상은 경영혁신 사례로도 손꼽힌다. 콘스탄티노플은 사실 전쟁 전부터 무너진 상태였다. 누구에게나 열렸던 승진과 출세의 길이 막혀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로 변하며 100만이 넘던 인구가 5만으로 줄고 부자들은 외국으로 떠났다. 동로마 멸망은 근대의 싹을 키웠다. 동로마의 지식이 서유럽에 대거 이식된 덕분이다. 신항로도 열렸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얼굴이다.
/권홍우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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