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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충남 당진 버그내 순례길] 순교자 기개 품고…상록수는 변함없이 기다리네

'韓천주교 요람' 솔뫼성지서 출발

은은한 솔내음에 신앙 갈증 싹~

김대건 신부 '200주년'도 되새겨

세계유산 합덕제, 여름 연꽃 장관

합덕성당은 100여년 세월 그대로

선인 희생 담긴 신리성지로 마무리

충남 당진 솔뫼성지는 뫼산(山)자를 형상화한 문을 통과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꺾이면서 종교계가 두 달가량 중단했던 법회와 미사·예배 재개를 속속 알리고 있지만 코로나19 재확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라도 마음 놓고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은 아직 요원하다.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과 신앙에 대한 갈증 사이에서 고민이 된다면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대신 한적한 성지순례지에서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부활절이 막 지난 화창한 날, 순교와 박해의 역사가 서린 버그내 순례길을 찾았다.

천주교 성지는 유독 서해 내포 지역에 몰려 있다. 서양 선교사들의 주요 진입로이자 천주교 전파를 위한 최초의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충남 당진은 초기 천주교의 유입과 박해의 역사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진 한국 천주교의 요람이자 못자리로 알려져 있다.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1~1846) 신부가 탄생한 솔뫼성지를 비롯해 충청도 최초의 성당인 합덕성당, 수많은 천주교인이 순교한 신리성지까지 한국 천주교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 성지가 이곳에 모여 있다. 이들 성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버그내 순례길은 충남 당진 합덕읍에서 삽교천을 따라 이어지는 총 13.3㎞ 코스다. ‘큰 하천’이라는 의미의 버그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깨져버린 일상에서 다친 마음이 위로를 받는 듯하다.

충남 당진시 천주교 솔뫼성지 내 김대건 신부 생가 앞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기념해 동상이 세워졌다.


순례길의 시작은 ‘한국의 베들레헴(예수가 태어난 성지)’으로 불리는 솔뫼성지다. 김 신부의 증조부부터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뫼산(山)자를 형상화한 정문을 통과하면 야외공연장인 솔뫼아레나가 자리하고 있다. 아레나는 모래를 깔아놓은 로마의 원형극장으로 김 신부와 동료들이 병오박해(1846) 때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한 것을 기념해 조성했다. 그 위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김 신부 생가에는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기념해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교황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 신부 생가를 지나면 소나무숲이 조성돼 있다. 솔뫼는 소나무가 뫼산(山)을 이루고 있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수백 년은 됐을법한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 소나무숲 가장자리에는 성모 마리아를 연상케 하는 흰색 조형물이 마치 김 신부의 동상을 감싸듯 굳건히 버티고 서 있다. 다시 정문 쪽으로 내려오면 기념성당이다. 김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입국할 때 탔던 선박 라파엘호를 형상화해 지어졌다고 한다.

충남 당진 솔뫼성지 내에 설치된 김대건 신부 동상.


코로나19로 기념관과 성당은 문을 닫았지만 은은한 솔 내음을 맡으며 성지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기에는 오히려 한적한 지금이 적기다.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잇달아 솔뫼성지를 방문하면서 천주교인들의 발길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앞서 유네스코는 2021년 탄생 200주년을 맞는 김 신부를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는데 성지 입구에는 이를 기념한 건립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충남 당진시 천주교 솔뫼성지를 방문한 성지순례객들이 담소를 나누며 울창한 소나무숲을 걷고 있다.




순례길의 다음 목적지는 합덕제다. 솔뫼성지를 나와 끝없이 펼쳐진 합덕평야를 가로질러 1시간가량 걷다 보니 어느새 세계관개시설물유산으로 등재된 합덕제에 도착했다. 합덕제는 본래 조선시대 때 곡창지대인 합덕평야에 물을 대기 위해 축조된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1.8㎞ 길이의 제방만 남아 있다. 순례길 여정 중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으로 7~8월이면 호수를 가득 메운 연꽃을 볼 수 있다. 합덕제 둑길은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가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따라 순교하기 위해 걸었던 마지막 길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라면 순교자들이 지나간 길을 뒤따라 걸으며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고, 그게 아니라도 솔뫼성지에서 받아온 안내 책자에 첫 번째 스탬프를 찍기 위해 꼭 들러야 하는 곳이다.

충남 당진 합덕성당을 단체로 방문한 성지 순례객들이 성당 옆 소나무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합덕제에서 1.4㎞를 더 걸어가면 100년 역사의 합덕성당이 나온다. 아산 공세리성당과 함께 충청도에 처음 세워진 성당으로 1890년 예산 고덕면 양촌리에 세워진 성당을 1899년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이후 페랭 신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봉헌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발을 벗고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삐걱거리는 마룻바닥부터 스테인드글라스, 벽돌로 세워진 기둥들이 오랜 역사를 품어 온 옛 모습 그대로 방문객을 맞는다. 성당 주변으로는 순교자들의 묘비와 순례자를 위한 유스호스텔도 마련돼 있다. 최근 몇 년 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성지로 떠오르면서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가는 이들까지 생겼을 정도로 인기다.

충남 당진 합덕성당을 방문한 성지 순례객들이 기도하고 있다.


성당을 나서면 본격적으로 순례길에 접어들 차례다. 제방 보수 기록을 적어둔 ‘합덕제 중수비’와 내포 출신 첫 순교자들이 마셔온 ‘원시장·원시보 우물터’, 손자선 성인과 가족, 교우들의 묘가 발굴된 ‘무명 순교자의 묘’를 지나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는 백미저수지 둑방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최종 목적지인 신리성지에 도착한다. 신리성지는 내포 교회의 초기 공소가 있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해 내포를 중심으로 활동한 다블뤼 주교가 21년 동안 머물렀던 주교관이자 성전이다. 다블뤼 주교는 초기 한글 교리서를 이곳에서 저술했다고 한다. 옛 모습으로 복원된 전통한옥 앞 야외 광장에는 이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경당, 조형물, 연못, 기념관이 있다. 조선 후기에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한 이곳은 로마시대 지하교회에 비유해 ‘한국의 카타콤바’라고 불린다.

출발지인 솔뫼성지부터 이곳까지는 꽤나 먼 거리이지만 요즘 같은 날씨에는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볼 만하다. 봄꽃이 지천으로 널렸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지역주민들의 삶의 자취와 사람 내음도 맡을 수 있다. 성지순례는 일반적인 여행이나 관광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 의미는 본인이 찾아가기 마련이다.
/당진=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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