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와 대구는 대표적인 식용 물고기다. 겨울철 식당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청어 과메기와 대구탕 냄새가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청어와 대구가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반드시 먹어야 하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음식도 아니거니와 구하기 힘든 값비싼 재료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흔히 먹을 수 있는 물고기 두 종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때는 청어와 대구가 화폐 역할을 하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사람들이 목숨까지 걸고 싸우던 시절이 있었다. 13~17세기 유럽과 미국이 청어와 대구 전쟁의 무대다. 유럽 각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신대륙 개척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물고기들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던 것일까.
청어와 대구를 중심으로 서구 역사의 흐름을 짚어 본 흥미로운 책이 나왔다. 일본 학자 모치 도시유키의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다.
■중세유럽, 육식 제한에 어류 소비 늘어
저자에 따르면 중세 유럽의 ‘물고기 전쟁’의 배경에는 기독교 문화가 있다. 기독교에서 육류는 성욕을 자극하는 ‘뜨거운 고기’로 규정된다. 당연히 육류 섭취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사순절, 수요일, 금요일 등 최대 일 년의 절반 정도는 단식일로 정하고 육류를 먹지 못하게 했다. 대신 ‘차가운 고기’ 생선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생선 섭취 허용은 시간이 흐르면서 생선 섭취에 대한 장려로 바뀌고, 단식일은 ‘피시 데이(fish day)’로 불리게 됐다.
이런 식문화에 종교만 영향을 미친 건 아니다. 육류 공급은 늘 부족했고, 곡류와 과일류는 일년 내내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다. 북유럽 등지에는 농경이 거의 힘든 곳도 있었다. 이에 반해 어류는 사계절 내내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어업 능력은 해군력과 비례했다. 그러다 보니 어업 장려 차원에서 생선 섭취를 독려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강과 호수까지 얼어붙는 겨울에 바다에서 떼로 몰려 다니는 청어와 대구는 마치 성경에 나오는 만나(manna)와 같았다. 결국 유럽인들은 청어와 대구를 사계절 저장하기 위한 방법 찾기에 골몰해, 소금에 절이고 바람에 말리는 법을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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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동맹 시초가 된 청어 무역
그런데 청어와 대구가 이동 경로를 종종 바꾸는 회유성 (回遊性) 어종이라는 점이 결정적 사건들을 낳는다. 13세기 초반 독일 북부 뤼베크에 청어 떼가 들이닥쳤다. 어부들에겐 말 그대로 횡재였고, 돈 냄새를 잘 맡는 유럽 각지의 상인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손 잡은 청어 무역 상인들 간의 동맹 결성이 한자동맹의 시초다. 한자동맹은 이후 200년 가까이 유럽 경제 패권을 쥐고 흔든다.
하지만 청어떼가 발트해를 떠나 북해로 향하면서 유럽의 경제 지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자동맹은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청어 조업과 가공 기술로 우뚝 일어섰다. 조업과 염장 기술이 한참 떨어졌던 잉글랜드는 청어 떼를 눈앞에 두고도 네덜란드의 성장을 부러워해야만 했다. 청어로 막대한 부를 쌓은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로 향한다.
■대구 조업, 美 독립에 주요 동인되기도
대서양에서는 대구가 유럽 열강 팽창 전략에 힘을 보탰다. 바짝 말린 대구는 장기간 보관이 가능해 탐험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식량이었다. 말린 대구와 맥주를 싣고 신항로 개척에 나섰던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북미 동부 해안의 대구 떼를 발견한다.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정착을 도운 것도 대구였다. 대구 조업권을 두고 벌어진 본국 잉글랜드와 식민지 미국 간의 갈등은 미국이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에 박차를 가하는 데도 주요 동인이 됐다. 이 때문에 아직도 미국 매사추세츠주 의회 의사당에는 수백 년째 대구 조형물이 걸려 있다.
저자는 어류 전문가가 아니다. 문학을 공부하던 중 역사의 주요 장면마다 물고기가 등장하는 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 청어와 대구라는 전략 자원을 둘러싼 대립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점이 저자의 흥미를 자극했다. 사실 갑자기 등장한 전략자원이 새로운 패권 전쟁의 서막을 알리기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가격 급락으로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는 석유도 현대사에 벼락 같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이제 인류 역사에 또 다시 새로운 전략 자원이 등장할 지도 모를 일이다. 1만7,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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