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10 항쟁 당시 서울 명동성당으로 숨어든 학생들을 잡으러 전투 경찰이 몰려들자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을 가로막고 이렇게 꾸짖었다. “나를 밟고 가라.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가라.”
그 날 뿐이던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변곡점에서 김 추기경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양심으로서 늘 불의에 맞섰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때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과 계엄사령부에 군의 사과와 철수를 직접 촉구했고,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에 대해서는 “이 정권의 뿌리에는 과연 양심과 도덕이 있는지 아니면 총칼이 있을 뿐인지”라고 정면 비판했다.
이렇게 강단 있는 큰 어른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30일 개봉하는 최종태 감독의 영화 ‘저 산 너머’는 김 추기경의 일곱 살 시절을 영상으로 전한다. 아파도 약은커녕 끼니도 제대로 챙길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가족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언젠가 올 그날을 기약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무 순해서 ‘순한’이라 불려
일곱 살 수환(이경훈)은 동네에서 ‘순한’으로 불리는 8남매 집안의 착한 막둥이다. 옹기장수 아버지(안내상)는 시름시름 앓고 있고, 어머니(이항나)가 삯바느질에 포목 행상, 노점 국화빵 장사까지 하며 생계를 책임진다. 여섯 형제자매가 이미 출가한 터라 수환은 바로 위 형 동한(전상현)과 놀며 하루하루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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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가족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는 법이 없다. 수환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와 시장에 쪼그리고 앉아 국화빵을 팔면서도 건너편 다른 국화빵 장수 사정을 걱정하고, 학교에서 오해를 받아도 친구 마음이 다칠까 걱정돼 침묵한다.
인삼장수가 아버지 약재로 사고 싶은 인삼을 너무 비싸게 파는 듯 싶어도 야속해하기보다는 나중에 커서 인삼장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하는, 심성이 고운 아이다. 수환의 할아버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배교 강요에 맞서 순교한 김보현 요한이다. 수환의 아버지 역시 하느님의 뜻이라며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아역 배우들의 열성적 사투리 연기
어머니와 고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수환을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수환의 마음을 어머니가 바로 잡아준다. 어머니는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는 법이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모든 게 하느님의 계획이라면서 미소 짓는다. 되려 어린 자식의 마음을 하느님 대신 자신이 차지하는 게 아닌지 걱정한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읽은 형이 사제가 되기 위해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먼저 향한다. 수환 역시 아버지의 순명, 어머니와 형의 믿음을 보며 시골 마을 ‘저 산 너머’에 있는 신앙의 세계를 꿈 꾼다.
영화 속 어린 배우들의 경북 시골 사투리가 정겹고, 어른 배우들의 따뜻한 눈빛 연기는 남루한 분장과 대비돼 더욱 빛이 난다. 불교 신자인 남상원 아이디앤플래닝그룹의 통 큰 투자 덕에 촬영이 가능했던 영화는 의도치 않게 부처님오신날 개봉한다. 이로 인해 종교와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가 더 뚜렷하게 전해질 수 있게 됐다.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12분.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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