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 후속대책으로 IT(정보통신) 플랫폼 사업자의 예방조치 의무를 강화하는 법안들이 쏟아지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사이버성폭력 범죄가 국내 규제를 받지 않는 텔레그램, 디스코드 등 외국 플랫폼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어 엉뚱한 곳에 불똥을 튀긴 꼴이라는 지적이다.
최근 한국인터넷기업협회(회장 한성숙)가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n번방 방지법이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한 제대로 된 대책인지를 두고 의견이 오갔다. 현재 국회에는 성폭력범죄처벌법, 정보통신망법 등을 통해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의 기술적 예방조치를 의무화하는 법안들이 다수 발의된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 23일 인터넷 사업자의 기술적 조치와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한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토론자들은 공통적으로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ISP)나 온라인서비스제공자(OSP)에 기술적 조치 의무를 지운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OSP는 ISP를 포괄하는 용어로, 서로 개념적 범위는 다르지만 국내법에서는 웹하드, P2P 사이트 같은 특수한 사업자부터 네이버, 카카오 같은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을 통칭하기 위해 사용된다.
최민식 경희대 교수는 “일부 법안은 피해자가 사업자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가능하게 했는데 이는 단순히 유통을 매개한, 범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사업자를 정범 취급하는 위험한 논리”라며 “또한 종단간 암호화 기술을 적용한 메신저의 경우 대화내용을 들여다볼 수 없어 필터링 기술 적용이 불가능한데, 불가능한 의무를 강제하는 법안”이라고 말했다. 예방조치를 위해서는 실시간으로 사용자들의 전체 대화를 모니터링해야 해 ‘필터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통신상 비밀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다.
정진근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특수 OSP는 이미 웹하드에 업로드돼 있는 저작물을 필터링하는 것이지만, 이를 ISP로 넓히면 ‘움직이고 있는’ 정보를 필터링하라는 것”이라며 “이게 인터넷상에서 과연 가능한 일인가”라고 되물었다. 인터넷 자유라는 대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작권법상 웹하드 같은 OSP에 적용된 책임제한 규정을 ISP로 단순히 넓혀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단순히 콘텐츠를 올릴 수 있는 ‘장(場)’을 제공했다고 해서 범죄자가 되는 것”이라며 “ISP를 추가적인 n번방 사건 방지를 위한 협조자로 보고, 어떤 부분을 협조해야 하는지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플랫폼이 아닌 형사사법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발언도 나왔다. 구태언 변호사는 “n번방 사건은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사건”이라며 “형사사법 시스템의 실패에 행정질서를 도입해 사업자를 규제하겠다는 건 엉뚱한 처방”이라고 말했다. 구 변호사는 이어 n번방 사건을 비롯한 아동·청소년 성착취사건은 통신비밀보호법상 감청이 가능한 대상범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구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범죄 현장 가까이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며 “형사소송법상 디지털 증거능력 정비와 함께 적법절차를 거친 감청을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 여야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n번방 사건 관련 법안들을 우선 처리하는 데 합의한 상황이다. 지난 29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형법 개정안,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이 통과됐다. 불법 성적 촬영물을 단순히 소지만 해도 처벌할 수 있게 하고, 미성년자 의제강간 기준 연령이 13세에서 16세로 높아졌다.
/오지현기자 ohj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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