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것이 좋다’는 말은 다 옛말이 돼버렸다. KBS를 대표하던 장수 예능 프로그램들이 하나 둘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분위기다. 19년간 방송된 ‘해피투게더 4’는 지난달 2일 종영했고, 21년간 장수해온 ‘개그콘서트’도 폐지 논란에 휩싸였다. 옛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 장수 예능 프로그램들의 위기는 예사롭지 않다.
지난 7일 KBS2의 대표 장수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이하 ‘개콘’)의 폐지설이 불거졌다. 개콘이 오는 20일 녹화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는 한 언론 보도가 단초가 됐다. KBS측은 “개콘 폐지는 아직 결정된 바 없다”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남겼다. 박형근 PD도 “계속 상황을 지켜봐야 하고 지금은 확실한 부분이 없다”고 비슷한 입장을 전했다.
1999년 9월 첫 방송을 시작한 개콘은 국내 최초 공개 스탠딩 코미디 프로그램이자 KBS의 대표 장수 프로로 자리잡았다. 정종철, 정형돈, 김병만, 이수근, 신봉선, 유세윤, 강유미 등 수많은 인기 스타와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전성기였던 2000년대에는 전국 시청률이 30%대를 웃돌며 ‘한 주의 마지막은 개콘과 함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고, 2003년에는 전국 시청률이 35.3%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몰락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MBC ‘우리 결혼했어요’, tvN ‘삼시세끼’ 와 같은 관찰·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예능 시장을 장악하면서 개콘의 스탠딩 코미디는 맥을 못췄다. 2015년 말 10%대 중후반을 찍어왔던 시청률은 2016년대에 9.85%(한국 갤럽)를 기록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콘의 중흥기를 이끈 서수민 PD는 KBS를 떠났다. 스타 코미디언과 인기 유행어를 배출했던 개콘의 위상도 사라졌다.
개콘의 인기가 현재까지 이어지지 못한 데는 프로그램 자체 내의 문제점도 분명히 존재했다. 과거 유머러스하게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졌던 시사 풍자는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변질됐고, 바보 개그나 사회적 약자와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개그는 대중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새로운 방송 트렌드를 코미디에 녹여내려는 개콘의 시도는 계속됐으나 외모나 몸매, 성별을 소재로 웃음을 강요하는 코미디 형식은 매년 이어졌다.
지난 해 1,000회를 맞은 개그콘서트 특집편에서도 그 문제점은 여실히 드러났다. 과거의 명성을 되살리고자 심현섭, 박준형 등 한 때 전성기를 누렸던 개그맨들을 부르고, 인기 코너를 재연해 대중의 시선을 끌었으나, 그 이상의 웃음은 없었다. 기존 인기 코너에 의존해 과거 유행어를 답습할 뿐 새롭게 재해석한 개그나 유의미한 웃음코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특히 2006년까지 인기였던 ‘사랑의 가족’ 재연을 통해선 15년이 지나서도 여전한 외모 비하 개그를 엿볼 수 있었다.
개그콘서트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위기를 직감한 KBS는 최근 들어 편성 시간대를 두 차례 변경하는 수도 뒀지만 약효가 들지 않았다. 시청률은 2%대까지 떨어졌다. 그 사이 예능 트렌드는 또 한번 변했다. 매체의 수는 많아졌고 예능은 더욱 다양해졌다. 유튜브, SNS를 비롯한 개인방송부터 웹 예능까지,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 앞에 개콘의 일방적인 콩트식 개그는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미 KBS는 지난 달 초 ‘해피 투게더(이하 해투)’ 종영으로 장수 예능의 위기를 경험한 바 있다. 2001년 첫 방송된 해피투게더는 2008년 시청률 22.8%(닐슨코리아 기준)로 정점을 찍는 등 2000년대 중후반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시청률 부진이 계속됐다. 이에 기존 스튜디오 토크쇼 대신 관찰 예능 형식을 적용해봤으나 평균 시청률은 3%에 머물렀다. 동시간대 TV조선 ‘미스터트롯’에 밀려 지난 3월에는 시청률이 1.8%까지 떨어졌다.
이 같은 시청률 부진은 결국 시즌 종료로 이어졌다. 그동안 해피투게더는 쟁반 노래방, 학창 시절 친구 찾기, 사우나 토크쇼 등 시즌별 형식을 달리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예능의 축이 리얼 버라이어티, 관찰, 오디션, 소통 등으로 넘어가고 웃음에 추구하는 대중들의 트렌드도 바뀌면서, 초대된 다수의 게스트에게서 에피소드를 끄집어내는 토크쇼 형식은 식상한 것이 됐다.
해피투게더 종영을 비롯해 개그콘서트의 폐지는 단순한 예능 프로그램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다른 대표적 장수 예능인 ‘1박 2일 시즌4’와 ‘날아라 슛돌이 뉴비기닝’ 등도 언제든 ‘해투’와 ‘개콘’의 수순을 밟을 수 있다. KBS 장수 예능은 과거 영광을 누리던 시절에서 벗어나, 완전히 바뀌어버린 트렌드를 읽어야만 할 위기에 봉착했다. 지난 개그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과 고리타분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과감한 시도 등 변화하는 사회와 대중의 코미디 취향에 따라야 한다.
요즘 예능에서는 시청자들이 TV 앞으로 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다가서는 예능 콘텐츠가 화제다. 거리로 나가 시민들과 담소·퀴즈를 나누며 웃음 뿐 아니라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tvN 의 ‘유퀴즈 온더블럭’이 대표적이다. MBC ‘놀면 뭐하니?’의 유산슬, ‘나혼자 산다’의 조지나,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화제가 된 김다비 처럼 부캐(부 캐릭터)들의 활약도 프로그램 속 재미를 넘어 타 방송사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예능 트렌드를 움직이고 있다.
이외에 유튜브 등을 활용해 짧은 길이의 영상과 즉각적인 웃음을 담은 예능 콘텐츠도 인기다. TV프로그램은 아니지만 JTBC의 웹 예능 ‘와썹맨’과 ‘워크맨’은 압축된 편집과 재치있는 자막으로 젊은 층을 사로잡고 있다. 이들 유튜브 채널에 구독자만 각각 226만명, 379만명에 달한다.
다행히 KBS도 예능 트렌드 변화의 물살을 탔다. 지난 2월 유튜브 전문 브랜드 스튜디오K를 앞세워 새로운 예능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KBS는 유튜브 공간을 활용한 신규 웹 예능 ‘구라철’을 선보였다. ‘구라철’은 13분 가량의 짧은 영상, 유연한 분위기로 시청자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KBS 예능도 트렌드에 맞춰 확장하고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한번의 위기 앞에 KBS는 어떤 승부수를 띄울까? tvN ‘코미디 빅리그’에 유일무이한 공개 코미디 형식을 넘겨줄 것인지, 폐지 위기를 극복하고 개콘의 상징성을 되찾을 것인지. 앞으로의 결정이 기대된다.
/안정은기자 seyo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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