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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 MSG 없는 '보통' 이야기가 그냥 좋아 [리뷰에세이]





오래전 기자가 되겠다는 대학생들 몇 명을 앞에 놓고 짧은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이 지옥일지라도 불구덩이에 뛰어들 것 같았던 그들에게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굳이 왜 이걸 하려고 하냐, 편한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였다.

세상 누구나 다 똑같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고, 사람 꽉 찬 버스나 지하철 타기 싫고, 회사 엘리베이터도 타기 싫고, 9시가 되면 퇴근하고 싶고, 점심 먹으면 자고 싶고, 오후엔 집에 가고 싶은…. “일이 너무 좋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는 당신의 오른팔로 보이고 싶어하는 교활한 부하직원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드라마에서 항상 고뇌에 빠져있거나, 진지하거나, 비열하거나, 환자를 살리겠다는 신념으로 가득한 의지의 한국인이거나, 사랑을 했다. 열정적으로. 법정드라마, 추리극과 함께 전문직 장르의 거대한 축을 담당했다. 실감나는 수술장면과 카리스마 넘치는 대사들로 가득한 멋진 의사들의 완벽한 승리에 시청자들은 엄청난 시청률로 화답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그런 MSG가 없다. 청춘스타 범벅에 평생세계와 환생까지 온갖 ‘러브 클리셰(익숙한 설정)’을 쏟아부어도 시청률 10%는커녕 5%도 넘기 힘든데,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12%를 넘어 계속 상승하고 있다. 톡 쏘는 콜라 사이다도 맛있지만, 가끔은 푹 끓여 대충 식혀놓은 미지근한 엄마표 식혜가 떠오르는 법, 자극적이지 않은 일상 이야기는 거부감 없이 모든 세대에게 ‘내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내용이 뭐냐?’ 물으면 “의사 5명과 주변인물의 사는 이야기”라고 답할 수밖에. 굵직한 줄기 없이 여기저기 툭툭 에피소드가 튀어나온다. 예고편을 통해 대충 어떤 사건이, 어떤 환자가 등장할지 예측해볼 수는 있으나 뒤돌아서면 내용을 잊어버리게 된다.

마치 시트콤처럼 매 회가 작은 연결고리만 둘 뿐 다른 에피소드로 채워짐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의 힘’이다. 다섯명의 착한 의사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적 메시지, 주변인들과 환자들의 희망과 감사에 울컥하다보면 80분이 흘쩍 흐르곤 한다.

연기력 출중한 배우들이 초반부터 극의 흐름을 꽉 잡았다. 첫회 등장한 황영희는 아들이 간이식을 기다리고, 어머니는 악성 종양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 보호자로 보는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모든 일이 잘 된 뒤 “난 복 많은 사람이다. 이렇게 좋은 선생님도 만나고 엄마도 살 수 있다 하니 이런 복이 어디 있겠냐”며 연신 인사하던 장면은 이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시청자들에게 잘 설명했다.



이어 등장한 염혜란과 김국희는 초반의 강세를 확고하게 굳혔다. 염혜란은 3년간 병원생활을 하며 ‘알거 다 아는’까칠한 엄마에서 아들을 잃은 뒤 눈물 흘리며 의료진에게 “우리 민영이 욕심 많은 엄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간호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만나서 3년 동안 행복하게 살다 갔습니다”라며 보는 이들이 눈물을 한바가지 쏟게 만들었다.

뮤지컬계에서 2년 연속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한 김국희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떼어낸 뇌종양 환자로 나왔다. 할머니들에게 “가슴 한쪽 없는게 그렇게 신기하냐”며 울분을 쏟아내는데 “예뻐서 그렇다”는 할머니들의 대답. “나 언제 죽냐”라는 말이 “뭐가 예쁘다고”로 바뀌는 찰나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남편과 부둥켜안고 “살고싶다”며 눈물을 쏟아내는건 작품이 끝까지 말하고자 하는 ‘희망’을 잘 담아냈다.



작품은 이 메시지 주인공들의 일상으로 천연 양념을 더한다. 이익준(조정석)의 인싸생활, 안정원(유연석)의 신부 혹은 신랑 되기, 김준완(정경호)의 비밀연애, 채송화(전미도)의 삼각관계, 양석형(김대명)의 엄마 등 각자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매회 한발씩 보폭을 늘리며 전개되고 있다.

회당 둘 혹은 세명의 환자들이 작품의 중심 메시지를 맡고 주인공들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흐름은 균형을 유지한다. 시청자를 순간 빨아들이지는 않지만 맥주 한잔 놓고 아무 생각 없이 보다 때로는 킥킥대고 때로는 펑펑 울다 밴드 음악에 다시 다음주를 기약한다.

그동안 착한 드라마는 수도 없이 많았다. 대부분 흥행은 못했지만…. 병원 이야기를 담았으니 ‘건강한 드라마’라고 하는게 좋겠다. 불륜에, 학교폭력에, 환생에, 평행세계까지 줄줄이 다른 세상 이야기만 하는 드라마시장에서 뒷골 안 땡기고, 심멋 그런 것 안하고, 속쓰리거나 불쾌해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있다는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최상진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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