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싱크탱크 유라시아그룹의 이언 브레머 회장의 진단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침체가 193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 이후 현 세대가 맞이하게 되는 첫 장기불황(공황·depression)이라는 게 브레머 회장의 얘기입니다. 과도한 분석으로 볼 수 있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브레머 회장과의 인터뷰는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상당한 하방위험(downside risk·다운사이드 리스크)을 거론하면서 장기침체 가능성을 경고하기 하루 전인 12일(현지시간)에 이뤄졌습니다. 스탠포드대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받고 최연소 후버연구소 펠로를 지낸 그는 정치와 경제를 넘나드는 혜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공식 인터뷰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내용을 전해 드립니다.
경기침체(recession) 아닌 ‘공황’…증조할아버지 때 대공황과는 달라
그러니까 브레머 회장은 코로나발 침체를 공황으로 정의합니다. 경기침체(recession)는 정의가 명확합니다. 2분기 연속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 경기침체라고 합니다. 미국의 1·4분기 성장률이 -4.8%(전기 대비 연환산 기준)이고 2·4분기에는 -40~-50%가량이 될 전망인 만큼 확실히 경기침체에 진입한 것은 맞습니다.
대신 공황은 경기침체가 수년 간 지속되면 일반적으로 공황이라고 합니다. 더 깊고 긴 침체를 말하죠. 명확한 정의가 없기에 1930년대 대공황처럼 산업생산이 반토막 이상 나고 실업률이 25%로 치솟으면 공황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마크 잔디 이코노미스트는 공황을 12개월 이상 두 자릿수 이상 실업률이라고 봅니다.
브레머 회장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경기침체는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나 전 세계 성장률 2% 미만을 뜻하고 불황은 명확한 정의가 없지만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그 정도와 깊이가 더 심한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백신이 나와 대량생산을 거쳐 전세계에 배분되고 모두가 접종을 마칠 때까지 2~3년간 전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애 첫 공황에 있다.”
그렇다고 현 상황이 1930년대의 대공황과 같은 건 아니라는 게 그의 말입니다. 브레머 회장은 “현재 개발도상국의 중산층은 대공황 때의 미국이나 유럽 중산층보다 더 잘 산다”며 “지금의 공황은 그때보다 덜 파괴적일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또 지금은 더 많은 자원과 자본, 정치기구, 경제연구소, 건강보험이 있어 대공황 때와는 비교가 어렵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리하면 지금은 단순 경기침체가 아닌 수년 간 지속되는 공황이고 이는 우리(현세대) 생애 처음이라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930년 대공황 당시보다 부가 늘었고 사회적 안전망과 많은 자원이 있어 사람들이 입는 피해와 그에 따른 느낌은 1930년대보다 덜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브레머 회장은 “그렇다고 상황이 괜찮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또 이 같은 악몽(공황)이 얼마나 지속되느냐는 백신의 보급속도와 추가적인 경기부양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입니다.
최근 대형 사모펀드인 칼라일그룹의 데이비드 루빈스타인 공동 창업자 겸 회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셧다운(폐쇄)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미국 경제에 대해 “경기침체와 공황 사이에 있다”고 했는데요. 꼭 공황은 아니어도 전반적으로 침체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급증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생애 첫 공황에 민족주의 더 심화…중산층에 좋은 일자리 제공해야
브레머 회장은 코로나19 이후 전세계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할 것이라고 점쳤습니다. 디글로벌라이제이션(deglobalization)이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얘기하는 그는 서플라이체인 재편이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습니다.
실제 코로나19 전염에 대한 공포가 국경차단과 여행금지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과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죠. 브레머 회장은 “우리 생애 첫 공황을 맞이하게 되면서 민족주의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경기불황으로 먹고 사는 게 문제가 되면 사회가 팍팍해지고 관용과 포용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는 의미죠. 미국도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한동안 경제가 예전 같지 않으면서 백인우월주의와 반이민 정서가 급격히 심해지는 상태였는데, 코로나발 침체가 장기화하면 이 같은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불만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는 꼴입니다.
해답은 뭘까요. 브레머 회장은 일자리를 꼽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회의 중추인 중산층에 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야 민족주의의 발흥을 막을 수 있다고 봤는데요.
“우리가 민족주의를 막는 방법은 여러분 나라의 중산층에게 더 나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겁니다. 물론 수십 년 동안 효과적으로 해오지 못했지만요.”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각국이 국제보건기구(WHO)를 비난하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브레머 회장은 “각국 정부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국제기구가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보건에 관한 최종책임은 각국 정부에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책임은 권한과 권력이 있는 곳에 물어야 한다”며 “그것은 각국 정부 책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WHO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WHO에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韓, 美 미사일 협조 땐 미중 갈등 한복판으로…한발 벗어나 있어야
브레머 회장은 우리나라에 대한 걱정도 했습니다. 미중 무역갈등이 사실상 경제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사이에 낀 우리나라가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대안은 양국 갈등에서 한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게 브레머 회장의 조언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과 중국 모두 경제 및 무역의 주요 파트너”라며 “방위비 분담에 대한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한미 안보동맹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고 운을 뗐습니다.
하지만 미중 갈등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게 사실상 없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죠. 우리나라가 지렛대를 가지고 미국과 중국을 화해시키거나 중재할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그는 미중 사이에서 ‘조용한’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낫다고 했습니다. 브레머 회장은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은 나를 놀라게 한다”며 “그것은 미중 갈등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는데요.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한반도 배치 문제를 염두에 둔 발언입니다. 그는 “이는 중국 정부가 한국 기업 때리기에 나섬으로써 한국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게 만들 확률을 높인다”며 “한국은 이런 싸움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같은 정책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여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웨이에 반도체 공급을 사실상 막는 방안까지 추진하고 있는데요.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에 줄서기를 강요할 것입니다. 어쨌든 전장에서 최대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곱씹어 볼만합니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